“(한완상 전 교육부총리가) 현 대통령을 옹호하는 회고록을 써 정치적 오해를 살 수 있다. (이 책은) 인간 본질에 대한 인문학이 아니다. 정치세력 중 한 쪽의 입장에서 정리한 회고록으로 인문학의 범주가 아니다. 전두환 회고록이 인문학이 아닌 것과 같은 이유”

KBS1라디오 등을 책임지는 이제원 라디오프로덕션1담당(국장급)이 한완상 전 부총리의 출연을 막으면서 한 발언이다. 특정 출연자에 대한 이 같은 ‘부적격 판단’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이에 전국언론노동조합 KBS본부(본부장 성재호)는 10일 오후 2시 노조 대회의실에서 ‘KBS에는 아직도 블랙리스트가 있다’는 주제로 기자회견을 열고, 해당 논란의 전말을 설명했다. 드러난 명단이 없을 뿐 ‘KBS판 블랙리스트’가 사실상 실재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이는 박근혜 전 대통령이 임명한 고대영 사장 및 이사진이 여전히 KBS를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벌어진 이라는 것이 언론노조 KBS본부의 주장이다.

▲전국언론노동조합 KBS본부(본부장 성재호)는 10일 오후 2시 노조 대회의실에서 ‘KBS에는 아직도 블랙리스트가 있다’는 주제로 기자회견을 개최했다.(사진=전국언론노동조합)

언론노조 KBS본부가 배포한 자료에 따르면 최근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다>란 제목의 책을 펴낸 한완상 전 부총리는 지난 5일 KBS1라디오<이주향의 인문학 산책>에 출연할 예정이었다. 출연자 선정은 진행자인 이주향 수원대 교수가 직접 선정한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KBS측은 한 전 부총리에게 녹음 당일 출연 취소를 통보했다. 이제원 담당이 제작진에게 위와 같은 의견을 전달하면서 ‘출연불가’를 결정했기 때문이다.

이제원 담당의 ‘출연자 검열’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지난달 10일 방송된 <이주향의 인문학 산책>에는 이정렬 전 판사(법무법인 동안 사무장)가 출연, 최근 헌법 개정 논의를 인문학 관점에서 진단하고 분석했다. 헌법 전문의 의미와 상징, 개헌 논의 상황 등을 설명하는 자리였다. 이제원 담당은 방송 직후 담당 PD를 불러 이 전 판사 출연시킨 결정을 강하게 질타했고, 이 전 판사의 출연은 ‘심각한 방송사고’라며 경위서 제출까지 지시했다. 하지만 해당 방송은 KBS 사내 심의기구에서 문제없이 통과했고 사후 심의평도 방송 내용에 충실했다고 평가받았다.

또한 이제원 담당은 지난 2일 KBS 신동만 환경전문 PD가 출연한 방송분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했다. 신동만 PD가 방송에서 ‘4대강 사업으로 인한 생태계 파괴 사례를 지적’하며 ‘생태계가 건강해지기를 바란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는데, ‘4대강 사업 비판은 일부의 의견’이라며 ‘이를 방송에서 언급하는 것은 부적절하고 공정성을 해친다’고 비판했다. 이 담당은 그러면서 <이주향의 인문학 산책>을 ‘아예 폐지하겠다’는 방침을 시사하기도 했다. 이에 MC와 작가 등이 반발하자 이들에 대한 교체 필요성을 언급하기도 했다.

논란의 중심에 선 이제원 담당은 고대영 사장이 직접 발탁한 인물로, 언론노조 KBS본부는 이 담당에 대해 “숱한 제작자율성을 침해를 자행해온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또한 이 담당은 개인 페이스북에 ‘5·18 북한군 침투설’ 등 극우 사이트 일베(일간베스트)의 게시물을 수차례 링크했고,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된 직후에는 헌법재판소를 조롱하고 비판하는 ‘헌재 근조(謹弔) 그림’을 게시하기도 했다.

한완상·황교익, "표현의 자유 훼손시키는 인물, KBS에서 물러나야"

언론노조 KBS본부는 지난 주말 한 전 부총리의 ‘출연취소’ 논란이 불거지자 한 전 부총리를 직접 찾아 인터뷰를 진행했다. 한 전 부총리는 인터뷰에서 “문재인 정부 밑에서 이런 일이 있다고 하는 게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며 “경악 정도가 아니라 ‘우리나라가 거꾸로 가는 데 공영방송이 앞장서나’라는 허탈감이 들었다”고 밝혔다.

담당 국장은 논란이 불거지자 한 전 부총리에게 전화를 걸어 사과했지만 ‘내 책 내용을 읽어봤냐’는 질문에 ‘읽지 않았다. (출연 취소 통보는) 경솔했다’는 취지로 답했고 전해졌다. 한 전 부총리는 “독재 정권이 늘 하던 그런 식의 예단이고, 이명박·박근혜 정권 지난 9년 동안 KBS가 유지해온 하나의 적폐 구조·문화”라며 “국장 수준에서 해결된 문제가 아니다. 이번 기회에 언론적폐를 청산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고 촉구했다.

<이주향의 인문학 산책> PD와 작가가 주고받은 SNS 대화 내용(사진=언론노조 KBS본부 제공)

언론노조 KBS본부는 지난 19대 대선 당시 문재인 당시 후보의 지지모임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아침마당> 제작진에게 ‘출연 보류’ 통보를 받은 황교익 맛 칼럼니스트와의 인터뷰도 진행했다. 황 씨는 KBS 내에서 이 같은 사건이 반복되는 이유에 대해 “공영방송 KBS는 국민이 주인인 방송이다. 주인들의 요구는 헌법대로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는 방송이 되길 바라는 것”이라며 “만일 표현의 자유를 훼손시키는 사람이 있다면 KBS에서 물러나야 한다”고 지적했다.

언론노조 성재호 KBS본부장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앞서 노조는 성명을 통해 이제원 담당에 대한 인사 조치를 요구했지만 고대영 사장은 말을 듣지 않고 있다. 사실상 ‘미필적 고의’로 고 사장이 블랙리스트를 조장하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성 본부장은 “정권이 바뀌었고 촛불국민들은 승리했지만 KBS는 여전히 박근혜 씨가 임명한 사장과 이사장 체제 아래서 움직이고 있는 것이 문제”라며 “이 같은 적폐세력들이 왜 물러나야 하는지를 분명히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언론노조 KBS본부의 이날 기자회견 직후, KBS는 이제원 담당을 직위해제하고 방송문화연구소로 전보조치했다. 이에 언론노조 KBS본부는 "사실관계도 조사하지 않고 보직만 박탈한 것에 대해 새노조는 전형적인 '꼬리자르기'라고 규정한다"며 "고대영 사장 등의 개입 여부를 끝까지 추적하겠다"고 밝혔다.

아래는 언론노조 KBS본부가 지난 주말 한완상 전 부총리와 황교익 맛칼럼니스트를 만나 인터뷰한 영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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