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들어 <추노>의 시청률이 소폭 하락하며 약보합세에 들어섰다. 왜일까? 간단하다. 도저히 감정이 이입되지 않는 오지호 - 이다해 커플의 러브라인에 너무 큰 비중이 주어졌고, 특히 이번 주엔 성동일과 공형진이 미미했기 때문이다.


‘성동일과 공형진’은 꼭 이 두 사람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이들이 상징하는 아래로부터의 역동적인 꿈틀거림, 그 힘이 사라졌다는 얘기다. 대신에 <추노>는 반정세력을 등장시켰다. 그것을 통해 대립축이 반정세력 대 집권세력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반정세력이라고 해봤자 어차피 지배세력이다. 좌의정 이경식이나 반정세력이나 그 나물에 그 밥, 모두 양반 무리들인 것이다. 게다가 반정세력이 왜 꼭 승리해야 하는지 그 이유도 모르겠다.


한양에서는 반정세력이 떠받드는 원손을 우리 민족의 원수나 마찬가지인 청나라의 용골대가 비호하고 나선다. 청나라는 원손을 이용해 조선을 조종하려는 것이다. 그렇다면 반정세력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은 매국질이다. 청나라에 부역하는 것이니까. 도저히 감정이입이 될 수 없다.


그렇다고 인조와 좌의정에게 감정이입이 되나? 당연히 아니다. 이들은 <추노> 속에서 악당에 해당한다. 특히 좌의정은 인명을 경시하고 목적을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냉혹함으로 악당의 면모를 과시한다.


그런데 반정세력도 인간적이지가 않다. 오지호와 이다해를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핍박하는 것이다. 그 목적이란 것이 정권탈취 이외엔 아무런 대의가 없어 보이는 데도. 그리하여 12회에 이르러선 이다해가 이들에게 민폐를 끼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이 이다해에게 민폐를 끼치는 것 같은 구도가 형성됐다.


만약 반정세력에게 감정이 이입됐다면, 또다시 그들의 발목을 잡는 이다해 민폐 논란이 거세게 일어났을 것이다. 하지만 하시은의 열연이 화제가 됐을 뿐, 일반 시청자들 사이에선 이다해 민폐 논란이 그다지 일어나지 않았다. 일반 시청자들이 반정세력에게 감정을 이입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새로운 대립축이 등장했는데 시청자들이 양쪽 어디에도 마음을 주지 않는다? 흥행에 적신호다. <추노>가 애초에 인기를 끌었던 건 민초들의 역동성을 표현하는 캐릭터들 때문이었는데, 우아한 러브라인과 양반들 권력놀음이 전면에 나서니 일종의 일탈이 벌어졌다고 하겠다. 이러니 시청률 하락이 당연했던 것이다.


드디어 마음을 친 장혁 이다해 커플


<추노>는 역동성과 속도감 등에 강점이 있었다. 하지만 절절하고 애달픈 멜러 정서는 부족했다. 이건 이상한 일이었다. <추노>라는 작품 자체가 끊임없이 애달픈 멜러를 부각시켜왔지 않은가?


장혁의 인생이 그렇게 추락한 것도, 그렇게 그악스럽게 추격하는 것도 오로지 이루지 못한 사랑 때문이었다. 오지호도 자신의 인생을 건 대의를 수행하는 와중에 이다해에게 한눈을 팔 정도로 강력한 멜러 정서를 보여줬다.


하지만 장혁의 멜러는 그다지 마음을 울리지 못했고, 오지호의 멜러는 역효과만 불러일으켰다. 과유불급이라고나 할까? 애잔한 눈길만으로 표현해도 될 걸 키스에 이르기까지 너무 오버해서 표현했기 때문이다. 원래 제작진의 의도대로라면 오지호의 키스와 장혁이 이다해의 환영을 좇는 모습이 교차편집 되며 시청자의 안타까움이 극에 달했어야 했겠지만, 불행히도 제작진의 기대는 무참히 빗나갔다. 이 장면은 빈축을 사고 시청자들을 더 이탈시켰을 뿐이다.


결정적으로 장혁과 오지호, 두 멜러의 중심축인 이다해가 대중의 비호감을 사고 말았다. 덕분에 <추노>의 멜러 정서는 완전히 무너졌고, 그리하여 <추노>는 멋있는 드라마이긴 하지만, 정서적으로 심하게 몰입되는 작품은 아닌 형편이 되었다.


이렇게 정서적인 몰입감이 떨어지고, 드라마의 핵심적인 축인 멜러 라인이 살지 않는 것도 <추노>가 40% 선을 넘지 못하고 약보합권에 머물러 있는 한 이유라고 하겠다.


12회에 모처럼 서광이 비쳤다. 처음으로 <추노> 멜러가 가슴을 쳤다. 마지막 부분에 장혁이 드디어 이다해를 보는 장면이었다. 장장 12회만의 만남이다. 이 만남은 비록 <아이리스>에서 이병헌이 NSS 침투 중 김태희와 재회할 때만큼 충격적이진 않았으나, 안타까움만은 못하지 않았다. 그동안 <추노>는 눈이 호강하던 드라마였다. 이 순간에 모처럼 멜러에 의해 마음이 움직였다.


지금까지 얘기한 것처럼, <추노>는 양반들의 권력놀음을 부각시킬 것이 아니라 민초들의 역동성과 정서적인 절절함을 부각시켜야 한다. 감정이입도 안 되고 왜 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반정 따위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다. 굳이 하려면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대의가 서야 하는데 그마저도 없지 않은가.


아래로부터 꿈틀거리는 역동성이 다시 살아나고, 각자의 그악스러운 생존의지가 충돌하는, 속도감과 볼거리가 넘치는 <추노>에 정서적 절절함을 느끼게 하는 멜러까지 살아나면 40% 돌파도 꿈은 아니다. 그렇지 않고 ‘도포짜리’들의 반정 놀음과 오지호의 답답한 사랑에 에너지를 소진하면 작품은 정체되고 말 것이다.

문화평론가, 블로그 http://ooljiana.tistory.com/를 운영하고 있다. 성룡과 퀸을 좋아했었고 영화감독을 잠시 꿈꿨었던 날라리다. 애국심이 과해서 가끔 불끈하다 욕을 바가지로 먹는 아픔이 있다.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