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서희라고 해서 왜 ‘막장의 아이콘’이고 싶겠는가. <아내의 유혹> 막장 논란이 한창일 당시에 일부 사람들은 막장드라마의 주역으로 자꾸 나오는 장서희에게도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말했었다.

장서희 입장에서 보면 정말 억울한 말이었다. 그녀는 1989년에 MBC 공채 탤런트가 된 이래 수많은 작품에 출연했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녀를 알아봐주지 않았다. 그렇게 10여 년의 무명세월을 견뎌야 했다. 그리고 2002년에 이르러 독한 막장드라마 유행을 선도한 <인어 아가씨>에 출연해서야 겨우 대중의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그다음 그녀는 비슷한 유형의 작품에 출연하여 손쉽게 인기를 이어가려고 하지 않았다. 그녀는 다양한 변신을 시도했다. 하지만 대중의 반응은 냉담했다. 오랜 무명 세월 끝에 한 순간 정상에 올랐다가, 다시 7년여의 추락이 이어졌다. 무명에서 정상으로 올라가는 과정은 차라리 나았으나, 한번 올라선 정상에서 추락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더구나 나이 먹으면 곧 주역 자리에서 퇴출되어야 하는 여배우이기에 그 불안이 더 컸을 것이다.

그리고 2009년에 이르러 <아내의 유혹>으로 다시 정상에 올랐다. 공교롭게도 또다시 막장드라마였다. 그녀는 두 번 연기대상을 받았는데, 그것이 2002년과 2009년이다. 막장드라마 두 번으로 정상에 두 번 선 것이다. 그리하여 무명의 설움을 벗었지만, 동시에 ‘막장녀’라는 오명을 뒤집어써야 했다.

한국에서 여배우의 수명은 극히 짧다. 남성은 중년의 나이까지 로맨스의 주역을 맡을 수 있지만, 여배우는 청춘 한 때가 지나면 곧 주변부로 밀려난 후, 나이를 조금 더 먹으면 악독한 시어머니 역할이나 해야 한다.

<아내의 유혹>에 출연했던 금보라는 자신이 악다구니 치는 어머니 배역을 맡은 것에 대해 모멸감을 느낀다고 했다. 하지만 여성으로서 연기를 하려면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했다. 금보라는 요즘 <제중원>에 또다시 같은 성격의 캐릭터로 출연하고 있다.

장서희도 <아내의 유혹>에 출연했을 때,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에 속상하다고 했다. 맡을 수 있는 역할이 극히 제한된 여배우로서, 그리고 다른 배역을 맡아봐야 냉대밖에 못 받는 인생을 견뎌야 했던 사람으로서, 그녀를 향한 막장 책임론이 얼마나 억울했을까.

장서희의 변신, 막장녀의 오명을 벗다

2009년에 막장드라마와 함께 화려한 정점에 섰던 그녀가 2010년을 맞아 다시 이미지 변신에 나섰다. 이번엔 의학드라마를 통해서다. 새 수목드라마 <산부인과>에 의사 역할로 나오는 것이다.

편성운은 매우 좋지 않다. 하필이면 <추노>와 붙었다. <추노>는 현재 대한민국에서 막장드라마들을 제외하고는 ‘원톱’에 해당하는 작품이다. 이런 작품과 붙었으니 성공하기가 매우 힘들다. 와중에 <추노>의 거친 남성성에 부담을 느끼는 시청자들을 <아직도 결혼하고 싶은 여자>가 선점해버린 상황이다. 이점은 불안하다.

하지만 작품 자체는 희망을 갖게 했다. 응급 제왕절개 수술로 오프닝을 장식한 <산부인과>에는 외과를 배경으로 하는 의학드라마 특유의 긴박감이 살아있었다. 그 속에서 장서희는 생명 하나만 보고 달려드는 의사 캐릭터를 선보였다. 그녀의 ‘의사 포스’도 어색하지 않았다.

그녀의 캐릭터는 열정, 실력, 미래진로에 대한 욕심, 불안한 사랑, 냉정함 등을 모두 갖춘 인물로 의학드라마에서 그리 새로운 성격은 아니다. 너무나도 익숙한 통속막장드라마의 전형적인 캐릭터를 당대의 팜므파탈로 만들었던 그녀이니만큼, 작품의 완성도가 조금만 받쳐준다면 얼마든지 익숙한 의사캐릭터에도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을 것이다.

장서희의 존재감이 어떤 것인지는 <천사의 유혹>을 떠올리면 알 수 있다. <천사의 유혹>은 이소연 원맨쇼라고 해도 좋을 정도의 내용이었지만, 이소연이 전혀 부각되지 못했었다. 반면에 장서희는 <아내의 유혹>을 완전히 장악했다. 그런 장서희이니만큼 의사 역할에도 신뢰를 갖게 되는 것이다.

뚜껑을 연 <산부인과>의 만듦새가 안정적이라는 점이 일단 좋은 징조다. 대대적인 성공작이 될 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최소한 실패작은 아닐 것 같다. 실패작만 아니라면, 그리고 그 속에서 의사 캐릭터를 잘 표현해내기만 한다면 장서희라는 여배우는 ‘막장녀’라는 오명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1회에선 그 희망이 보였다. 다만 장서희의 파트너 남자배우들의 연기력이 불안한 것이 변수라고 하겠다. 파트너가 받쳐주지 못하면 극에 밀도감이 안 생긴다. 아무튼, 이 작품이 장서희의 새로운 전기가 되길 바란다.

문화평론가, 블로그 http://ooljiana.tistory.com/를 운영하고 있다. 성룡과 퀸을 좋아했었고 영화감독을 잠시 꿈꿨었던 날라리다. 애국심이 과해서 가끔 불끈하다 욕을 바가지로 먹는 아픔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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