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문회는 본래 그런 법이다. 야당은 공격하고, 여당은 방어하고. 새삼스러운 풍경도 아니지만 확실히 지난 청문회들과 차이는 존재했다. 저녁뉴스들로만 본다면 이번 인사청문회는 여당은 불참하고 야당만 한 것 같다. 과거라면 억지로라도 지켰던 기계적 중립조차 이번 청문회 정국에서는 무너진 것이다. 그러자 시민들은 스스로 중계영상을 클립으로 만들어 공유하기에 이르렀다. 게릴라뉴스, 시민뉴스가 등장하고 있다.

7일. 김이수 헌법재판소장 후보자, 김동연 경제부총리 후보자 그리고 강경화 외교부장관 후보자 3인의 인사청문회가 동시에 열렸다. 언론은 이날을 슈퍼 수요일라고 불렀다. 그러나 보도할 거리가 많은 언론에게만 슈퍼 수요일이었다. 뉴스거리가 많을 언론 입장에서는 대목일지 몰라도 청문회마다 혈압이 오른다는 시민들에게도 역시 그럴지 적어도 한번은 생각해봤어야 했다. 뉴스 소비자들의 입장 따윈 나 몰라라 붙인 이름 슈퍼 수요일에서 한국 언론들의 일그러진 현재를 발견하게 된다.

7일 국회에서 열린 김동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후보자(왼쪽부터), 강경화 외교부 장관 후보자, 김이수 헌법재판소장 후보자에 대한 인사청문회에서 여야 위원들의 질문에 각 후보들이 답변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나마 청문회라도 제대로 된다면 또 모를 일이다. 요즘 청문회가 과연 필요하냐는 질문을 던지는 시민들이 많다. 무엇보다 함량미달인 청문회 질문들이 문제다. 이미 제기된, 심지어 사과까지 한 오보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의원들의 질문공세는 그저 음량만 높인 어제 뉴스에 지나지 않았다. 오죽하면 재방송 청문회, 언론 대리 청문회라는 냉소적인 말들이 회자되겠는가.

또한 언론들이 슈퍼 수요일이라고 잔뜩 띄워놓았다면 그중에 스타 정치인 하나쯤은 나왔어야 옳다. 그래야 슈퍼가 어울릴 것이다. 그러나 누구도 청문회를 통해 시민스타로 떠오르지 못했다. 스타는커녕 검증받지 않는 국회의원들의 숨겨왔던 검은 행적들이 속속 드러나고 말뿐이었다. 정치인들이 자신들에게 표를 주는 국민을 적대시하면서도 문자폭탄 운운하면서 민의를 억압하려고 한 의도를 비로소 이해하게 되는 아이러니도 발생한다.

그런 인사청문회를 향해 시민들은 재방송 청문회, 언론 대리 청문회라고 냉소하고 있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7일 저녁 방송 뉴스들엔 편파적으로 편집된 뉴스들이 넘쳐났다. 그런 모습들에서 이미 사과까지 내놓은 오보를 굳이 오보가 아니었다고 우기고 싶어 하는 고집을 보게 된다.

정파적 이해관계의 충돌로 변질된 청문회라는 것에 공직 후보자의 자질과 능력을 검증한다는 본래의 취지는 사라졌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언론은 끝까지 그 본질의 부분을 지키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우리가 배운 저널리즘은 그렇다. 또한 뉴스에 쓰기 좋은 야당의원이 고성을 지르는 장면과 후보자가 고개를 숙이는 장면이 의도에 맞더라도 긴 청문회 과정에서 각 후보자들의 해명은 같은 비중으로 다뤘어야 했다. 최소한 그런 정도는 했어야 기계적 중립이란 말이라도 할 수 있다.

7일 국회에서 열린 강경화 외교부 장관 후보자(왼쪽부터), 김동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후보자, 김이수 헌법재판소장 후보자에 대한 인사청문회에서 여야 위원들의 질문에 각 후보들이 힘든 표정을 짓고 있다. Ⓒ연합뉴스

또한 후보자의 해명과 여당의 발언을 별도로 보도했어야 했다. 여당은 당연히 후보자 방어라는 일방적 선입견으로 여당 의원들의 발언을 편성하지 않은 것은 편집권 남용의 우려가 크다. 기계적 중립마저 볼 수 없다는 지적이 괜히 나오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처럼 기계적 중립마저 포기한 이번 청문회 보도가 뉴스 소비자들로부터 불만과 반발을 사는 것은 당연하다. 그럼에도 그런 소비자의 의견이 반영되지 않는다. 다시 이 지점에서 노룩취재의 의미를 새길 필요가 있다. 노룩취재란 기자가 현장을 버린 참담한 현상을 말한다. 그러나 진짜 노룩취재 아니, ‘노룩언론’이란 소비자의 불만에 눈과 귀를 닫은 고집불통을 의미한다.

한국은 이미 저널리즘의 포화상태다. 그럼에도 시민들은 볼 뉴스가 없다고 불평한다. 참다못한 시민들은 스스로 좋은 뉴스를 선별해 아카이브를 만들고, 심지어 직접 뉴스를 만들어 온라인상에 공유하고 있다. 대안언론도 필요 없다는 외침은 차라리 절망적으로 들어야 할 것이다. 언론으로서는 대단한 위기를 느껴야 하는 한계상황임에도 정작 당사자들은 그것을 취향이나 편향의 문제로 애써 호도하고 있다. 그렇게 언론과 시민의 간극은 점점 더 멀어지고 있다. 급기야 이번에는 언론을 향해 촛불을 들어야 한다는 말까지 나오는 상황이다. 이런 위기라도 광고와 기금이 있는 언론은 여전히 안녕하실 거다.

매스 미디어랑 같이 보고 달리 말하기. 매일 물 한 바가지씩 마당에 붓는 마음으로 티비와 씨름하고 있다. ‘탁발의 티비 읽기’ http://artofdie.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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