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스타가 갈수록 흥미진진해진다. 절반쯤 달려온 파스타는 그동안 단점(버럭 현욱)으로 지적되었던 것도 장점인 듯 착각하게 만들었다. 초반 공부의신 폭탄을 맞고 휘청거리던 파스타를 힘겹게 지탱하던 효녀가장 공효진의 연기는 캔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 같은 케릭터를 매력만점의 존재로 만들고 있다. 애초부터 공효진표 드라마였기에 사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쓰러져가는 파스타를 구해낸 요인은 효녀가장 공효진과 이선균의 조금 이른 듯한 화해 분위기에다가 스토리를 만들어가는 섬세한 터치라고 할 수 있다. 거기다가 초기에 답답했던 알렉스의 안정을 되찾은 연기가 유경과 현욱 사이의 긴장과 이완을 거들며 3각 구도를 무난하게 지탱해주고 있다. 끝으로 시청자들을 교묘하게 휘두르는 파스타식 반전이 큰 힘이 되고 있다.

서숙향이란 다소 촌스런 이름을 가진 작가의 생각보다 세련되고 발칙한 도발에 시청자들은 매번 지고 만다. 첫 번째 도발은 울진항에서 바다에 빠진 현욱과 유경의 여관장면. 처음이었듯이 둘이 성급한 하룻밤을 보내며 관계의 급진전 등등은 식상하지만 드라마에서는 쉽게 채용하고 또 수용되는 플롯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현욱은 옷만 갈아입고는 동틀 때까지 선창가에서 미련한 낭만을 선사했다.

그리고 8회의 공효진이 저장고에 갇히는 사건이 두 번째이다. 7회 예고에서 대부분을 할애한 이 사건은 그렇잖아도 울진에서 한번 당한 시청자들의 긴장 속에서 설마 이번에는 하는 짐작과 기대를 저버렸다. 드라마와 영화의 이해할 수 없는 법칙이 있다. 주인공은 죽지 않는다. 죽을 걸 뻔히 알면서 위험을 무릎 쓴다. 등등. 저장고에 갇힌 공효진은 저장고 온도조절기를 끌까말까 갈등하게 된다.

게다가 그날 저장고에는 다음날 특별 손님들을 위해 고가의 재료들이 잔뜩 들어온 상태. 게다가 지금까지 이선균의 버럭질을 빌어서 강조해온 요리에 대한 지나칠 정도로 엄격한 정직함에 비추어볼 때 공효진은 저장고 온도조절기를 끝내 끄지 못하고 다음날 반죽음이 되서 발견될 것이라 짐작했다. 이후의 진행이야 익숙한 것.

그러나 파스타는 공효진을 원더우먼으로 만들지 않았다. 그리고 속일 수 있는 마지막까지도 그 사실을 감췄다. 공효진이 갇힌 사실을 알고 다들 난리가 나고 급히 열쇠공이 달려와 문을 연다. 바깥의 소동에도 미동도 않는 효진. 누가 봐도 저장고 온도를 그대로 둔 열혈 요리사 공효진은 꽁꽁 언 채로 의식을 잃었구나 했다. 그러나 웬걸 공효진은 죄스럽고 민망해서 고개를 들지 못한 것이었다.

유쾌한 사기였다. 그냥 반전이 아니라 식상한 드라마의 법칙을 깬 발칙한 반란이라고 해야 한다. 그 외에 8회에 벌어진 진진한 이야기는 이미 다른 블로거들이 친절하게 알려주고 있어 굳이 중복될 필요는 없어 생략한다. 그러나 여전히 공효진과 이선균이 나누는 대사는 흥미로운 말의 만찬거리를 제공해준다. 소위 명대사라고 할 만큼 잔뜩 힘주지 않는 평범한 말을 그렇게 만든다. 연기라는 것이 언어를 요리하는 것이나 다름없기에 파스타는 화면으로 줄 수 없는 파스타 대신 말을 참 맛나게 제공해주고 있다.

6.7회에는 공효진의 짧은 한 마디들이 생략과 함축으로 필자를 미치게 만들었다. 정말 별 거 아닌 독백이었다. "이제 술이 깨네"와 "그런데 왜 나왔을까?" 딱 두 마디다. 드라마에 그다지 몰입하는 편이 아닌 필자를 드라마가 끝나고도 잔향과 여운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했다. 8회에는 용기 없는 연약한 그러나 요리사로서는 낙제점인 공효진 대신에 마초 셰프가 그 역을 맡았다.

얼어 죽지 그랬냐고 그간의 달콤한 시간들 깡그리 잊은 듯 매정한 얘기를 늘어놓더니 마지막엔 "고맙다. 살아줘서.."한다. 그리고 종일 굶은 공효진을 데리고 뜨거운 국밥을 사주려는 이선균에 발끈한 공효진을 향해 "그래 좋다. 그래 가지고 내 맘대로 된 게 뭐 있는데?"한다. 그렇다. 바보도 아닌 이상 똑똑한 세프님도 다 알고 계시다. 자기가 소리만 질렀지 기실 실속 없이 지기만 했다는 사실을.

그것을 말한다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숨기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 전제 하에 "내 주방에 여잔 너 하나로 충분해"와 "난 너를 도마에 올려놓고 칼질 안한다. 요리 안한다고"하는 말은 처음으로 예고 없이 마친 다음 주 전개될 상황에 대한 예고보다 더 강력한 진술이다.

하기사 막내 요리사 굶었다고 따로 밥 사주러 가는 셰프는 둘 중 하나이다. 아주 따뜻한 인간미를 가졌거나 아니면 좋아하는 것이다. 셰프 최현욱은 적어도 전자는 아니다. 이들은 이제 적어도 우리 연애 안 해요! 라고 시치미 떼는 일은 그만 둔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불안불안하다. 또 질 것만 같은 예상이다. (1.28일 발행)

매스 미디어랑 같이 보고 달리 말하기. 매일 물 한 바가지씩 마당에 붓는 마음으로 티비와 씨름하고 있다. ‘탁발의 티비 읽기’ http://artofdie.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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