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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인생까지 가르치는 무한도전[하재근의 TV이야기]
하재근/문화평론가 | 승인 2010.01.24 15:59

바로 지난주에 폭풍 같은 웃음을 줬던 <무한도전>이, 이번 주에는 가슴 깊은 곳을 울리는 감동을 줬다. 새해가 시작되자마자 끊임없이 이어지는 레전드의 질주다.

행운이 따랐다. 그저 비인기 종목인 여자권투의 세계챔피언을 후원하려고 했을 뿐인데, 어떻게 된 일인지 촬영기간에 잡힌 타이틀전이 하필이면 한일전이었다. 한일전이면 한국인이 ‘광분’하는 이슈 아닌가. 행운도 이런 행운이 없다. 한일전이 실제로 전개되면서 프로그램 몰입도가 대폭 상승하는 효과가 발생했다.

   
 

거기서 끝이 아니다. 한일전의 일반적인 대립 구도가 프로그램 중반에 완전히 뒤집혔다. 한국 선수는 스폰서도 없고, 대전료도 제대로 못 받아 현실적으로 타이틀전을 준비하기 힘든 열악한 처지라고 했다. 반면에 일본 선수는 이미 스폰서까지 생긴 데다가, 일본이라는 나라 자체가 격투기에 열광하는 나라이기 때문에 우리 선수보다 훨씬 좋은 상황이라고 했다. 이야말로 한국인의 가슴에 불을 지르는 구도였다.

그런데 막상 <무한도전>팀이 일본에 갔을 때 그 전형적인 구도는 완전히 무너져버렸다. 일본에 가니 이미 스폰서를 확보했다는 일본 선수는 가정집을 개조한 소규모 체육관에서 운동하고 있었다. 생계를 생각하면 아르바이트를 하는 게 차라리 더 낫다고 말할 정도의 처지였다. 물론 일본의 아르바이트는 인건비가 극히 열악한 우리와 달리, 직장인 월급 정도의 돈을 벌 수 있긴 하다. 그렇다 해도 풍족한 상황이 아닌 것만은 확실했다.

가장 전형적으로 시청자의 가슴에 불을 지를 수 있는 구도는, 일본 선수가 번듯한 대형체육관에서 초현대식으로 트레이닝을 받으며, 풍부한 자본력의 뒷받침까지 지원받는 상황이었다. 그러면 마치 냉전 시절 열악한 처지의 록키와 온갖 지원을 받는 소련 선수가 맞붙는 영화에서와 같은 극히 익숙하면서 파괴력 있는 대결구도가 만들어질 수 있었다.

일본에서 그 강력하고도 전형적인 구도가 송두리째 무너진 것이다. 여기까지는 행운이라고 할 수 있다. 단순하고 도식적인 대결구도에서, ‘인간’이 부각될 수 있는 쪽으로 상황이 전개됐기 때문이다. 누굴 응원해야 할 지 알 수 없는 상황은, 단순오락용으론 부적절하지만 보다 깊은 차원의 감동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 지점에서 <무한도전>의 특징이 드러났다. <무한도전>은 한국 선수 대 일본 선수라는 도식적인 대결구도에 집착하지 않았다. 일본에 가서 일본 선수의 상황을 확인한 후, 일본 선수의 인간적인 면모를 적극적으로 부각시킨 것이다. 그녀가 개인적인 사연을 얘기할 때 프로그램은 배경음악을 깔며 줌인샷을 보여줬는데, 그건 전형적으로 우리편, 주인공을 부각시킬 때 사용하는 기법이었다. <무한도전>은 그녀가 이겨야 하는 이유까지도 성실하게 내보냈다.

이러면 일본 선수에게 시청자의 감정이 이입된다. 이건 일반적인 구도가 아니다. 인간적인 건 한국 선수뿐이어야 한다. 안타까운 사연도 한국 선수에게만 있어야 한다. 그래야 한국 선수에게 감정을 이입해 일본 선수를 때려 부술 때 환호할 수 있게 된다. 화끈하게 한국 선수에게만 몰입시키려면 방법은 간단하다. 일본에 가서 일본 선수의 상황이 ‘얄미우면’ 그대로 방송하고, 그렇지 않다면 촬영도 안 하고 방송도 안 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무한도전>은 일본 선수에게도 몰입을 유도함으로서 도식적인 구도를 적극적으로 부순 것이다.

한일전이라는 폭발적인 대결구도, 즉 넝쿨째 굴러들어온 호박을 제발로 차버린 셈인데 여기서 <무한도전>의 특징이 분명히 드러났다. 바로 ‘인간’에게 집중한다는 특징이 그것이다. 추격전 특집을 하면서도 철거민의 아픔을 바탕에 깔았고, 식목일 특집을 하며 박명수가 사악한 상황극을 할 때 거기에도 자원독점으로 인한 서민의 고통에 대한 문제의식이 깔려있었다. 이번 에피소드도 <무한도전>은 단순 대결을 더 깊은 인간드라마로 승화시켰다.

추성훈 선수의 조국은 격투다. 그는 일본인도 아니고 한국인도 아니다. 오로지 링 위에서 그는 자유롭다. 그런 그이기 때문에, 추 선수가 한국 선수를 이겼을 때도 그 승리에 감동을 느끼며 그를 응원할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이번에 <무한도전>에서 그려진 두 선수는 한국 대표 대 일본 대표로 국가대항전을 벌이는 것이 아니다. 한 인간으로서, 운동인으로서 자신의 삶을 치열하게 살 뿐이다. 누군가는 지고 누군가는 이길 것이다. 어느 쪽이 지든 안타까울 수밖에 없는 구도다. 두 선수 모두에게 인간적으로 몰입하게 됐기 때문에 가슴을 격동시키는 감동이 생겨날 수 있다.

이런 마치 작품성 있는 영화와도 같은 구도가 얻어걸린 것이 바로 <무한도전>이 맞은 행운이다. 그것을 놓치지 않고 인간드라마로 그려낸 것에서 <무한도전>의 진정성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또, 이번 <무한도전>이 준 깊은 감동은 산다는 것의 의미를 느끼게 했다는 데에도 있다. <무한도전>은 예능프로그램답지 않게 최현미 선수의 스파링 경기를 9라운드 모두 보여줬다. 예능이 어떤 곳인가? 말 한두 마디만 쳐져도 그대로 잘라버리는 살벌한 판이 예능이다. 일반적으로는 스파링 경기 중간 몇 라운드 정도는 편집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무한도전>은 벽돌을 차곡차곡 쌓듯 모든 회의 시작점을 다 보여줬고 심지어 마무리 운동까지 놓치지 않았다.

그것은 ‘최선을 다 한다는 것’의 의미를 느끼게 했다. 처음에 예능스러웠던 멤버들은 최현미 선수의 처절한 투혼에 점차 말을 잃어갔다. 경건함마저 느끼게 한 그것은 한 인간이 보여준 삶의 치열함이었다.

일본에서도 삶을 생각하게 하는 이야기가 이어졌다. 일본 선수는 경기를 ‘서로의 인생에 대한 집념이 링 위에서 만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이 정도면 뭐, 인생극장이다. 다큐도 이보다 치열하고 감동적이기 힘들 것이다. 웬만한 영화보다도 깊은 의미를 담고, 몰입도도 큰 에피소드였다. 이젠 <무한도전>이 인생까지 가르치고 있다.

문화평론가, 블로그 http://ooljiana.tistory.com/를 운영하고 있다. 성룡과 퀸을 좋아했었고 영화감독을 잠시 꿈꿨었던 날라리다. 애국심이 과해서 가끔 불끈하다 욕을 바가지로 먹는 아픔이 있다.

 


 

하재근/문화평론가  webmaster@mediau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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