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연쇄살인사건을 모티브로 하고 거기에 한술 더 떠 과거와 현재의 만남을 그려 어쩔 수 없이 <시그널>과 시작 전부터 비교를 당했던 <터널>. 16부작이 마무리된 후 그 누구도 <터널>을 두고 <시그널>을 떠올리지 않는다. 오히려 이 작품이 과연 입봉 작가와 입봉 피디의 작품이 맞나 의심스러울 정도다. 안정적인 정서와 구도로 단 한 회도 허투루 보낸 회가 없을 정도로 완성도 높은 이야기를 담아 16부작을 완주한 <터널>. 박광호가 터널로 떠날 때 아쉬움에 눈물을 흘렸던 이는 남겨진 강력 1팀과 딸 신재이(이유영 분)만이 아니었다.

<시그널>과 비슷했다고, 아니 오히려 비슷한 건 <수사반장>

OCN 주말드라마 <터널>

비슷한 소재, 거기에 유사한 설정을 들었음에도 <시그널>을 전혀 떠올리지 않도록 만든 <터널>은 그 자체로 스릴러물의 새로운 구획 확장이다. <시그널>은 비슷한 시기 방영된 <응답하라 1988>의 수사 버전처럼 그 당시의 시대를 전면에 내세우며 80년대에서 2017년이 되어도 전혀 발전하지 않은 적폐 사회를 실감나게 그려낸다. 그 변화되지 않은, 심지어 고착화되어 기득권으로 공고해진 적폐는 김은희 작가의 전매특허이자 박근혜 정권 아래서 그것을 실감했던 사람들의 이성을 깨우고 분노케 했다. 그리고 그 분노는 과거의 이재한(조진웅 분) 형사와 그의 집요함을 계승한 현재의 박해영(이재훈 분), 차수현(김혜수 분)의 동지애로 그가 못다 한 사건을 완결하며 마무리된다.

마찬가지로 과거에서 쫓던 연쇄 살인범을 따라 터널을 통해 교신 대신 직접 2017년으로 넘어온 박광호. 여전히 그가 살던 80년대는 연쇄 살인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던 주먹구구식 수사 방식을 고집하는 전근대적 사회였다. 하지만 살인범을 쫓는 그의 집념은 시간을 초월할 만큼 열정적이다. <시그널>이 이재한이란 캐릭터를 통해 연쇄 살인과 사이코패스가 등장하는 시대에 주목했다면, <터널>은 똑같이 집요한 형사를 전면에 내세웠지만 그를 통해 80년대의 <수사반장>을 불러들인다.

1989년 무려 880부작으로 종영했던 <수사반장>의 상징적 인물은 콜롬보 반장처럼 낡은 바바리코트를 걸쳐 입은 박반장의 최불암이었다. 우리가 배우 최불암을 떠올리면 연상되는 그 이미지 그대로 우리의 아버지처럼 그는 사건의 아버지 역할을 기꺼이 자임한다. 법을 어기며 잘못을 저지른 범죄자들을 때론 호통치지만 죄를 미워하지 사람을 미워하지 말란 그 뻔한 경구처럼 가난 등의 이유로 범죄의 길에 빠진 범죄자들에게 연민과 동정을 아끼지 않았다. 씁쓰레하게 사건을 마무리하고 등돌리는 박반장의 모습에서는 오늘날 스릴러의 냉혹한 수사의 흔적을 쉬이 찾을 수는 없었다. 그런 아버지 같은 박반장의 그늘 아래 수사원들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다. 남형사(남성훈 분)가 그나마 샤프했을까, 한덩치 하지만 노총각의 순정을 숨기지 못하는 조형사(조경환 분)도 홀아비의 애환을 고스란히 드러내던 김형사(김상순 분)도 인간미하면 뒤처지지 않는 사람들이다. 사건을 추적하는 데 있어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람들이지만, 그럼에도 그들이 기억되는 지점은 결국 숨길 수 없는 휴머니즘이었다.

그리고 이제 <터널>은 시간을 거슬러 자신보다도 나이 많은 딸과 해후한 아재 형사 박광호를 현대로 불러들이며 그 시절 <수사반장>의 향수를 고스란히 가져온다. 연쇄 살인이 무엇인지도 모르던 시절, 당연히 사건이 나면 주변의 수상한 범죄자들을 불러 족치는 것이 유일한 수사 방식이던 시절, 연달아 죽어가는 부녀자들 그리고 그들로 인해 고통받는 남겨진 사람들을 보며 자책하던 광호는 시간을 거슬러 현재로 온다. 핸드폰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이 과거의 인물은 달라진 시대에 당황하는 것도 잠시, 그가 자신이 살던 시절에 했던 그 열렬한 수사를 향한 열정으로 어느덧 강력 1팀의 막내이자 에이스 형사로 떡하니 자리를 잡는다.

강력 1팀의 막내가 된 80년대의 아재 형사

OCN 주말드라마 <터널>

바로 그가 막내라는 호칭이 무색하게 그 시절 막내였던 하지만 이제는 자신보다 훨씬 늙어버린 강력 1팀장을 비롯해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은 김선재(윤현민 분)와 곽수사관(김병철 분), 송수사관(강기영 분)을 자신만의 열정으로 감복시킨다. 그의 열정이란 바로 '형사란~'이란 서두로 시작하여 끝까지 자신의 맡은 바 책임을 포기하지 말라는 열정이 담뿍 담긴 직업의식이다. 그리고 그 책임감은 시간을 거슬러 그가 잡지 못한 사건의 희생자 아들이자, 이제는 스스로 어머니의 살인범을 잡겠다고 나선 김선재와 해후하게 만든다. 어머니를 잃은 줄도 모르던, 겨우 걸음마를 떼던 아이는 범죄 수사 밖에는 안중에 없는 인간미 제로의 수사관이 되었고, 그런 그의 파트너로 박광호가 등장하며 피해자와 수사관의 사연 있는 관계가 성립된다.

그렇게 <터널>은 자신이 미처 어머니를 잃었다는 사실조차 모르던 시절에 어머니를 잃은 선재와 범인을 쫓아 시간을 거스른 박광호를 전면에 내세우며 시간이 흘러도 치유되지 않는 범죄의 상흔과 그 치유를 주제로 삼는다. 거기에 시간을 거스른 광호로 인해 삶이 왜곡된 딸 신재이까지 엮이며 광호의 극한 수사는 좀 더 기구해진다. 자신이 알지도 못했던 딸, 자신이 잡지 못한 피해자의 아들과 함께 수사를 진행하는 박광호. 하지만 그는 2017년이란 시간적 딜레마를 잡고자 하는 범인을 끝까지 추적하여 피해자들을 위로하고자 했던 아재 형사의 열정으로 극복한다.

물론 <터널>은 요즘 빈번하게 등장하는 여느 스릴러물처럼 사이코패스 연쇄 살인범들이 범인으로 등장한다. 정호영(허성태 분), 목진우(김민상 분), 두 사이코패스의 시대를 넘나드는 범행이 16부작의 줄기이다. 하지만 매번 새로운 연쇄 살인마의 만행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스릴러의 특성상 그들의 범죄 방식에 천착하다가 때로는 그들에게 매달리고 마는 스릴러의 패착을 <터널>은 넘어선다. 그들이 사이코패스든 소시오패스든, 그리고 어머니 때문이건 타고났건, 혹은 자신의 범죄를 신의 용서로 거창하게 포장하건 결국 그들은 살인범죄자에 불과하다고 단언한다. 그들의 죄로 드라마를 치장하는 대신 그들을 잡기 위해 애쓰고 상처받는 피해자들과 열정의 수사관을 전면에 내세우며 최근의 스릴러와 차별성을 가진다.

마지막 회 목진우를 잡아넣고 나서 그 연쇄 살인범의 후일담 대신 드라마는 피해자의 가족들을 찾아 소식을 전하고 좀 더 빨리 범인을 잡지 못했음을 사죄한다. 그 옛날 <수사반장>처럼 인간미 넘치는 마무리로 끝을 맺는 방식은 어쩌면 2017년에 가장 진부한 휴머니즘이지만 그래서 새롭다. 물론 왜 박광호가 시간을 거스르게 되었는가부터 따지고 들자면 군데군데 빈 구멍들은 있다. 하지만 마지막 회 모든 사건을 해결한 박광호가 터널에 간절하게 귀로의 소망을 전하고 그에 터널이 반응하듯 이 모든 사건의 시작이 그의 범인을 향한 열렬한 수사 의지였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또한 드문드문 보이는 구멍조차도 메우고도 남을 만큼 각각의 캐릭터가 보여준 설득력과 그 설득력을 더 설득시키는 전개, 연출이 <터널>을 오래도록 따스하게 기억에 남도록 할 것이다. '바람처럼 왔다가~'하는 85년 조용필의 <킬리만자로 표범>의 아련한 노랫가락과 함께.

미디어를 통해 세상을 바라봅니다.
톺아보기 http://5252-jh.tistory.com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