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이라는 제도 아래서 여성들은 자의식을 망각하기, 아니 포기당할 위험성이 높다. 남자는 결혼 후에라도 직장 생활을 통해 사회 안에서 경제적으로 자의식을 영위할 수 있다. 반면에 여자는 결혼을 통해 생긴 아이를 키우는 동안에 ‘주부’라는 원하지 않는 다른 자의식이 자리잡는다. 때문에 주부가 되는 순간 여자라는 자의식이 희석되기 쉬운 것이 기혼 여성이 직면한 위기일 것이다.

무비컬, 또는 노블컬인 뮤지컬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는 결혼 후 여자라는 자의식을 망각하고 평범한 주부로 살아가던 프란체스카가 낯선 남자 로버트를 통해 여자라는 자의식을 되찾는 서사로 읽을 수 있는 뮤지컬이다.

남편이 아닌 이방인 남성은 경계해야 할 타자다. 프란체스카가 1막에서 로버트를 처음 만난 저녁에, 입고 있던 청바지 대신에 스커트로 갈아입는 장면은 낯선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주부라기보다는 ‘여자’로 보이고 싶어 하는 프란체스카의 심리를 환복, 옷을 갈아입는 여인의 심리로 표현했다고 볼 수 있다.

뮤지컬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주)쇼노트, (주)프레인글로벌

그리고 이내 프란체스카와 로버트는 사랑에 빠진다. 한데 두 사람의 사랑이 충만해야 할 공간에 프란체스카의 집 전화기가 가만 두지 않는다. 프란체스카의 남편 버드나 이웃하는 마지가 거는 전화벨 소리가 로버트와의 로맨스를 방해한다.

통상적인 뮤지컬이라면 로버트와의 사랑에 방해가 되는 요소를 제거하고 극이 진행될 것이다. 그런데 이 뮤지컬은 둘의 사랑이 영글어가는 타이밍에 남편이나 이웃의 전화벨이 울리는 연출을 통해 프란체스카와 로버트의 사랑에 온전히 집중하지 못하게 만든다. 왜일까.

프란체스카와 로버트의 사랑은 ‘불륜’이다. 아무리 평생에 한 번 있을 사랑이라고 미화한다 한들 둘의 사랑은 엄연히 불륜이다. 버드와의 결혼은 프란체스카가 이탈리아 사람이라는 자의식, 여자라는 자의식을 잊게 만들었다.

로버트와의 만남을 통해 ‘여자’가 되려는 프란체스카의 자의식은 전화벨을 통해 다시금 ‘주부’로 되돌려버리는 현실 자각의 장치다. 동시에 프란체스카로 하여금 프란체스카가 있어야 할 자리가 로버트의 품이 아니라 가족으로 되돌아와야 한다는 걸 보여주는 ‘가족주의의 강화’를 보여준다.

뮤지컬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주)쇼노트, (주)프레인글로벌

대개의 뮤지컬은 사랑의 영속성 혹은 가족주의의 강화를 관객에게 제시한다. 하지만 이 뮤지컬은 가족주의를 강화하는 대신에 사랑의 영속성은, 다른 말로 하면 평생에 단 한 번 찾아온 불륜을 갉아먹는다.

만일 프란체스카가 로버트가 내민 사랑의 도피 제안에 화합했다면 프란체스카의 남편인 버드와 남은 두 자녀는 불륜 행각에 놀아난 아내 또는 엄마로 말미암아 파탄을 겪을 것이다. 하지만 프란체스카는 사랑 대신에 가족을 택한다. 영화 ‘남과 여’에서 전도연은 사랑을 위해 모든 걸 버릴 각오를 했지만, 반대로 공유가 가정을 선택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로버트와의 로맨스를 균열시키고 결혼이라는 현실을 프란체스카로 하여금 자각하게 만드는 전화벨 소리는 사랑의 달콤함이 있어야 할 자리 대신에 가족을 환기하게 만드는, 가족주의를 강화하는 장치다. 전화기를 통해 타고 흘러드는 가족주의는 로버트와의 사랑보다 우위에 자리한다.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에서 불륜이 힘을 잃는 동인은 ‘가족주의’다.

로버트가 프란체스카에게 함께 떠나자고 고백하는 넘버는 뮤지컬 전체를 통틀어 하이라이트에 포함하는 넘버다. 그럼에도 이 넘버가 통상의 뮤지컬 넘버처럼 극적으로 다가오지 못하는 이유는 평생에 단 한 번 찾아온 강렬한 사랑, 냉정히 말하면 불륜보다 가족주의가 강화되기 때문이다.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는 가족주의가 불륜을 능가하는 저력을 발휘하는 아주 특별한 사례에 속하는 뮤지컬이다.

늘 이성과 감성의 공존을 꿈꾸고자 혹은 디오니시즘을 바라며 우뇌의 쿠데타를 꿈꾸지만 항상 좌뇌에 진압당하는 아폴로니즘의 역설을 겪는 비평가. http://blog.daum.net/js7kei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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