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전혁수 기자] 인터넷 상에서 때 아닌 '코리아 패싱'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가 ''코리아 패싱'을 모른다고 해서 시작된 논쟁은 애초에 '코리아 패싱'이란 용어가 있느냐 없느냐까지 따져 묻고 있는 상황이다.

▲25일 JTBC 대선후보 초청 TV토론회에 참석한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 (사진=JTBC 화면 캡처)

25일 JTBC 대선후보 초청 TV토론에서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가 '코리아패싱'을 모른다고 답해 외교 문제에 관심이 없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을 받았다. 송영길 의원은 "코리아 패싱 문제는 사실 새롭게 항상 언어들이 나오기 때문에 계속 대선후보가 워낙 일정이 바빠서 신문을 제대로 볼 시간도 없기 때문에 그것을 놓칠 수 있다고 본다"고 해명했다.

'코리아 패싱'은 콩글리시? 외교부도 모르는 말?

그런데 인터넷 상에서는 코리아 패싱이라는 단어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김진애 전 민주통합당 의원은 자신의 트위터에 "콩글리시는 문재인도 모른다... 유승민만 안다? 웃기네요. 원어민에게 '코리아 패싱' 아냐 물었더니 콩글리시라고 ㅋㅋㅋ"라며 코리아 패싱이라는 말 자체를 문제 삼았다.

▲사진. (김진애 전 의원 트위터)

중앙일보는 <원어민에게 '코리아 패싱' 아냐 물었더니...> 기사에서 원어민에게 전화를 해서 물어봤다. 중앙데일리에서 정치 및 사회 뉴스를 담당하는 미국인 에디터 데이비드 볼로츠코는 "콩글리시"라고 답했다고 한다. 중앙일보는 "정확히 말하면 저팽글리시다. 문제는 이게 문법상으로 말이 안 된다는 점"이라면서 "정확한 영어 표현은 뭘까. 좀 길다. Korea has been passed over"라면서 기사를 마무리했다.

조국 서울대 법학대학원 교수도 자신의 트위터에 "엉터리 영어 실력 자랑한 유승민"이라고 조롱하면서 동아일보의 <논란 된 '코리아 패싱', 알고보니 콩글리시? 외교부 "美도 안 쓰는 용어"> 기사를 링크했다.

조국 교수가 제시한 기사에서는 조준혁 외교부 대변인이 "최근 국내 일각에서 사용하는 '코리아 패싱'이라는 특이한 용어가 정확히 무슨 의미로 쓰이고 있는지 모르겠다"면서 "미국 등 국가에서 이 용어를 사용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한 것이 부각돼 있다.

외교부에서 코리아 패싱 거론된 적 있어

그렇다면 '코리아 패싱'은 정말 사용되지 않는 콩글리시에 불과한 용어일까. 외교부 출입기자들의 얘기는 앞서 소개된 주장들과는 달랐다. 외교부 정례브리핑에서 '코리아 패싱'에 관련된 질의 응답이 있었다고 한다.

먼저 조국 교수가 인용한 동아일보 기사를 살펴봤다. 그 결과 조준혁 대변인이 해당 기사에 등장한 말을 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동아일보의 해당 기사에는 앞뒤 맥락이 모두 빠져있다.

▲외교부 조준혁 대변인. (연합뉴스)

당시 브리핑을 살펴보면 조 대변인은 해당 발언 직후 "오바마 행정부 당시에 한미동맹 관계가 최상의 상태였음은 주지하는 바와 같다"면서 "트럼프 신행정부 하에서도 북핵·북한문제 등 한반도 문제와 관련해서는 한국 정부의 입장을 존중하고, 사전 조율한다는 것이 기본원칙"이라고 밝혔다.

즉 조준혁 대변인은 '코리아 패싱'이라는 말이 쓰일 상황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 것이지 용어 자체를 부정한 것이 아니다. 앞뒤 맥락을 교묘하게 뺀 동아일보의 기사로 인해 시각이 흐려진 셈이다.

박문각 시사상식사전에는 코리아 패싱이라는 단어가 등재돼 있다. 해당 사전은 코리아 패싱을 "직역하면 '한국 건너뛰기'라는 뜻으로,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이슈에서 한국이 빠진 채 논의되는 형상을 말한다. 즉, 미국과 중국, 일본 등 주변국들이 한반도 안보 현안에서 한국을 배제하는 것을 일컫는다. 1998년 빌 클린턴 당시 미국 대통령이 일본을 건너뛰고 곧장 중국만 방문하고 돌아간 상황을 재팬 패싱이라고 부른데서 유래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코리아 패싱, 이미 언론에서 통용되고 있는 용어

과거 언론에서도 코리아 패싱이란 단어는 수차례 등장한다. 14년 전인 2003년 프레시안 <한국은 '변수'도 못된다? - [데스크 칼럼] 블레어의 '한국 홀대'와 청와대 대응>이 대표적인 사례다. 프레시안은 영국의 토니 블레어 총리의 아시아 순방 당시 한국 홀대를 지적했다.

프레시안은 "블래어 총리는 북핵 문제가 가장 중요한 이슈로 부각된 이번 아시아 순방에서도 상대적으로 친근한 일본에는 이틀이나 머물면서 한국에서는 하룻밤도 묵지 않고 당일 중국으로 출국했다"는 점 등을 '코리아 패싱'이라고 지적했다.

▲지난 2008년 11월 5일 한겨레 1면.

지난 2008년에는 한겨레가 이명박 정권의 취약한 외교역량으로 인한 미국의 코리아 패싱에 대한 우려를 지적했다. 당시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대선에서 승리하면서 한겨레는 "이명박 정권은 취임 이후 한미일 동맹에 모든 걸 걸었으나, 미일의 보수정권과도 코드를 맞추지 못하는 취약한 외교 역량을 드러냈다"면서 "외교가에서는 벌써부터 국제사회가 한국을 따돌리는 '코리아 패싱'에 대한 우려가 나오고 있다"고 지적했다.

최근에는 미국에 트럼프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코리아 패싱'이라는 단어가 더욱 활발하게 등장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어디로 튈지 모르는 불확실성으로 자칫 북핵문제 등 한국과 직결되는 외교 사안에서 제외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4월 1일부터 TV토론으로 논란이 불거지기 전인 24일까지 '코리아 패싱'이라는 단어가 포함된 기사만 229건(네이버 제휴 언론사 기준)에 이른다.

▲지난 11일 중앙일보 남정호 논설위원이 작성한 칼럼. 남 위원은 소통 강화로 '코리아 패싱'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중에서도 '코리아 패싱'을 가장 애용하는 언론사 중 하나가 바로 중앙일보다. 그럼에도 중앙일보는 앞서 소개했듯이 '코리아 패싱은 저팽글리시'라는 내용과 함께 정확한 문법까지 소개한 기사를 게재했다.

중앙일보가 지난 3월 31일부터 현재까지 대선 TV토론 외에 '코리아 패싱'이라는 단어를 넣어 작성한 글만 10여 개에 이른다. 이 중 중앙일보의 논설위원, 데스크 등이 작성한 사설, 칼럼이 절반 이상이다.

▲지난 24일 외교부 차관을 지낸 김성한 고려대 교수가 동아일보에 게재한 시론.

외교부가 '코리아 패싱'을 모른다고 기사를 작성한 동아일보도 4월 들어 외교부, 데스크 발 '코리아 패싱'과 관련한 글이 6차례 등장했다. 특히 24일자 동아일보는 외교부 차관을 지낸 김성한 고려대 국제대학원장이 <"한국은 중국의 일부" 발언의 의미>라는 시론에서 "미중 양국의 '코리아 패싱'에 의해 분단이 지속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외교부 전 차관이 작성한 시론에 등장한 코리아 패싱, 외교부가 코리아 패싱을 모를 수 없다는 근거다.

종합해보면 '코리아 패싱'이라는 단어는 콩글리시, 중앙일보의 말을 빌리면 저팽글리시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오랜 시간 한국언론에서 활용된 용어로 활용 가치가 높고, 신조어 정도로 받아들이는 것이 올바를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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