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혼란 속에서도 뭔가 발전이 있다는 것은 좋은 것이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주관한 대선후보들의 1차 TV토론을 보고 든 생각이다. 각 후보들은 앞서 두 차례의 TV토론을 거치면서 어느 정도 토론에 적응을 한 듯 했다. 특히 앞서 TV토론들에서 겉도는 것처럼 보였던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는 안정감을 좀 더 찾은 걸로 보인다.

안철수 후보는 여론조사 지지율이 하락하는 추세라는 것을 감안했는지 ‘미래 대 과거’ 프레임을 선점하려고 노력했다. 홍준표 자유한국당 후보 쪽으로 결집하는 보수층 유권자들을 겨냥하기보다는 중도 내지는 부동층 득표를 우선 확보하겠다는 전략으로 풀이 된다.

안철수 후보가 ‘색깔론’으로 보일 수 있는 언행을 자제하고 문재인 캠프에서 유출된 ‘네거티브 문건’ 문제를 부각시키려고 한 것은 이런 맥락으로 보인다. 안철수 후보는 이 문건을 출력물로 제시하기까지 했는데, 이 대목을 이번 TV토론의 주요 공격 포인트로 보았다는 뜻이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자신은 미래와 새롭고 모범적인 정치를 말하지만 다른 후보들은 과거의 구태정치를 반복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주겠다는 거다.

그러나 문재인 후보에게 “제가 갑철수 입니까”, “MB아바타 입니까”라고 직접적으로 묻는 방식으로는 이런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없었던 걸로 보인다. 문재인 후보 입장에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답하면 그만이고 도리어 “SNS 상의 악의적인 공격으로 치면 이 자리에 있는 모든 후보를 합친 것보다 제가 더 많은 비난을 받았다”고 답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안철수 후보 측 역시 지금까지 다양한 방법으로 기성 정치의 문법에 해당하는 ‘네거티브 전술’을 구사해왔다. 거기에 ‘갑철수’나 ‘MB아바타’라는 악선전의 맥락을 모르던 사람들도 이를 알도록 해줬다는 점에서 굳이 이런 방식을 취해야 했는지는 의문이다. 토론 주제가 외교안보와 북핵 관련이었음에도 이런 주제를 꺼내들었다는 것 역시 불성실한 토론 태도로 비칠 수 있다.

여하튼 안철수 후보가 이런 방식으로 좌측 공략을 재개하였다고 해석한다면 우측의 누수를 막는 카드도 나온 것으로 볼 수 있다. 안철수 후보가 ‘강간 모의’ 논란에 휘말린 홍준표 후보의 사퇴를 강하게 촉구하고, 박지원 국민의당 대표가 ‘안철수 정권’에서 공직을 맡지 않기로 했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전자는 안철수 후보를 찍으면 오히려 보수정치의 재기가 어렵다는 식의 ‘보수파산론’에 ‘후보자질론’으로 맞선 것이며, 후자는 ‘박지원 상왕론’에 대응하는 발언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박지원 대표가 차기 정부에서 공직을 맡지 않는다는 정도로 ‘박지원 상왕론’을 불식시킬 수 있을 것인지는 의문이다. 역대의 사례로 본다면 오히려 공직을 맡지 않은 사람들이 더 문제였던 경우도 있다. 김대중 정권 시기 이른바 ‘동교동 가신’들의 문제도 그런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이 정도 수준의 답을 내놓으면서 유승민 바른정당 후보를 향해 “그만 좀 괴롭히라”고 쏘아붙인 것도 정치적 효과를 장담하기 어렵다.

안철수 후보가 홍준표 후보의 사퇴를 강하게 요구한 것은 좋은 선택이지만 그를 향한 토론 태도가 불분명했다는 것도 문제였다. 안철수 후보는 홍준표 후보를 상대로 인정하지 않겠다며 얼굴을 보지 않고 질문에 답하겠다고 했는데, 실질적으로 그게 어떤 기술적 효과를 갖는 것인지는 의문이다. 토론 상대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듯이 해놓고 마지막에는 질문까지 했다.

23일 서울 여의도 KBS 본관에서 열린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주최 대선후보 초청 토론회에 모인 5당 대선후보들 (연합뉴스)

안철수 후보가 자신의 ‘이미지’를 강화하면서도 다소 미숙한 토론전략을 보였다면, 유승민 바른정당 후보는 자신이 목표한 바를 이루기 위해 정치적으로 바람직하지 않은 방식으로 공세를 이어갔다고 평가할 수 있다. 특히 송민순 전 외교부 장관이 야기한 2007년 북한인권결의안 표결 문제가 그렇다.

유승민 후보는 북한에게 물어보고 표결했느냐는 간단한 질문에 문재인 후보의 말이 계속 바뀌고 있다며 거짓말 하는 후보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문제는 제각기 다른 맥락의 질문과 답변을 하나로 뭉뚱그려서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문재인 후보가 지난해 이 문제가 처음 불거질 당시 “기억나지 않는다”고 한 것은 “북한에 물어봤는지 기억나지 않는다”가 아니라 자신이 처음에는 찬성 표결 입장에 가까웠다는 당시 관계자의 증언에 대해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답한 것이다. “북한에 물어보고 표결하지 않았다”는 것은 북한의 입장을 표결 방침을 결정하는데 반영하지 않았다는 뜻이지 북한의 반응을 확인해보지 않았다는 말이 아니다. 보수세력이 주장하는 것은 “2007년 북한인권결의안 표결을 김정일의 재가를 받고 했다”는 것인데 이에 대한 문재인 후보의 답변은 일관된 ‘부정’이다.

그런데 유승민 후보는 이 맥락을 모두 뒤섞어서 문재인 후보가 말 바꾸기와 거짓말을 했다고 주장했다. 이 논쟁에서 양측 주장의 기본 얼개는 이미 지난해 전부 나왔고 현재까지 크게 변화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이제와서 말을 바꾸고 말고 할 것도 없다. 유승민 후보가 이를 모를리 없음에도 이런 방식을 공격을 계속하는 건 당내에서 사실상 사퇴를 종용하는 여론이 분출하는 상황에서 외교안보 노선을 중심으로 문재인 후보와 맞설 수 있는 유일한 보수 후보로 강하게 인식되기를 바라기 때문일 것이다.

홍준표 후보의 경우 나름대로 문재인 후보를 향해 의혹도 제기하고 안보에 강한 모습을 보여주려고도 했으나 결국 남은 것은 ‘돼지흥분제’ 문제밖에 없는듯 하다. 다만 마지막에 문재인 후보가 성완종 리스트 관련 대목을 자극하자 참여정부의 사면 문제를 꺼낸 것은 새로운 논란을 예고할 것으로 보인다.

핵심은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이 참여정부 시기 이례적으로 2차례 사면된 배경에 어떤 ‘거래’가 있는 것 아니냐는 거다. 이 문제도 2015년 당시 신문 지상을 뒤덮었던 것이므로 대략 논쟁의 얼개가 나와 있다.

보수언론 등은 성완종 전 회장 사면 문제가 이명박 정부와 노건평 씨와의 어떤 ‘거래’로 이어질 수 있다는 보도를 했으나, 당시 이해찬 전 총리 등은 1차 사면은 자민련의 김종필 전 총리 요구로, 2차 사면은 차기 정권인 이명박 대통령 인수위의 요청으로 이뤄진 것이라고 해명한 바 있다. 특히 2차 사면의 경우는 당시 인수위 실세였던 정두언 전 의원이 이명박 정권 인사들이 성완종 전 회장 사면을 특별히 챙겼다는 증언을 이미 공개적으로 한 바 있다. 그러나 선거는 역시 선거이기 때문에 홍준표 후보나 유승민 후보가 이후 이 대목을 다시 공격 포인트로 삼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을 듯 하다.

어쨌든 이날 TV토론의 이러한 부분들을 보면 현재의 판세를 뒤집는 효과를 발휘하기는 어려울 걸로 보인다. 앞으로 추가 일정이 남아있는 만큼 유권자들의 감성을 자극하는 진실공방 보다는 정책의 효용을 검증하는 방향으로 토론이 이뤄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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