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4일, JTBC <뉴스룸>의 앵커브리핑은 ‘악의 평범성’이란 학자 한나 아렌트의 말을 인용했다. 언제나처럼 앵커브리핑은 함축과 은유를 활용해 주제를 수려하게 끌어냈다. 한나 아렌트는 모르겠지만 우리가 아는 사람도 그런 말을 했었다. 시인 김수영. 혁명은 하지 못하고 방만 바꾸고 말았다는 시어로 수십 년 후의, 촛불광장 이후의 대한민국 시민들에게 경계를 남긴 시인이었다.

세계를 놀라게 한 촛불 민주주의는 적폐의 상징이었던 대통령을 탄핵과 파면을 이끌었다. 그리고 맞이하게 된 장미대선 아니 촛불대선이다. 그러면서 탄핵의 의미가 퇴색되어 가고 있다. 그 상황에서 손석희의 앵커브리핑은 폭민을 이야기했다. 그 표현을 따르자면 “절망과 증오로 가득한 시민들에게는 증오할 대상을 앞장서 만들어주는 누군가가 있게 마련이고, 그들의 조작에 의해 시민은 바로 폭민이 된다”는 것이다.

JTBC 뉴스룸 [앵커브리핑] 그들이 만들어낸 어둠…시민 아닌 '폭민'

더 엄격히 말하자면 <뉴스룸>의 말이 아니라 학자의 말이지만 그것을 떠나서 말인즉 두 개로 나눠진 광장을 보자면 족집게가 따로 없을 만큼 정확하다. 폭민. 그것은 “누군가 목적을 위해 조작해 만들어내는 변질된 시민의 다름 이름”이라는 것이다.

사실 어떻게 보면 앵커브리핑은 <뉴스룸>의 섬 같은 느낌도 없지 않다. <뉴스룸>이 폭민이라는 개념까지 꺼낸 것은 분명 ‘누군가의 목적에 따라 시국이 조작되는’ 것을 경계하기 위함이다. 실제로 가짜뉴스를 퍼 나른 한 구청장이 있었고, 그 가짜뉴스의 최초 작성자가 전직 국정원 직원이었다는 흉흉한, 생각하기도 싫은 2012년의 대선 정국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일지 모른다.

그러면서 손석희 앵커는 “민주주의는 적을 품고 가야 하는 제도다”라는 말을 꺼내놓고는 어찌 보면 평소의 그답지 않은 말로 결론을 맺었다. “끊임없이 선동하고, 시민을 폭민으로 조장하기 위해 앞장서는 사람들. 이들은 과연 품어야 할 가치가 있는 적일까를 다시 한 번 깊게 고민해야 하는 오늘”이라고 말이다.

JTBC 뉴스룸 [앵커브리핑] 그들이 만들어낸 어둠…시민 아닌 '폭민'

흥미롭게도 이날의 앵커브리핑은 이후 이어진 대선후보들과의 황당한 인터뷰와 묘하게 정서적으로 연결이 되기도 해서 허탈한 웃음을 짓게도 했지만 진짜로 우리 모두는, 촛불을 들고 그 추운 겨울을 뚫고나온 우리는 진심으로 고민을 해봐야만 할 것이다.

그런데 과연 ‘끊임없이 선동하는’ 주체는 과연 그들뿐인지에 대한 의문도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아니 누가 적이며, 무엇이 적폐인지에 대한 판단을 가리려는 또 다른 선동은 없는지에 대한 <뉴스룸>의 의견을 묻고 싶기도 하다.

JTBC 뉴스룸 [앵커브리핑] 그들이 만들어낸 어둠…시민 아닌 '폭민'

모두에 앵커브리핑이 말한 학자 대신에 4.19를 가장 아프게 기록한 시인 김수영을 말한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의 시 <하...... 그림자가 없다>의 일부.

우리들의 적은 늠름하지 않다(중략)
그들은 조금도 사나운 악한이 아니다
그들은 선량하기까지도 하다
그들은 민주주의자를 가장하고(중략)
그들은 말하자면 우리들의 곁에 있다
우리들의 전선(戰線)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것이 우리들의 싸움을 이다지도 어려운 것으로 만든다(하략)

광장에서 협박과 증오의 말들을 쏟아내고, 야구방망이를 휘두르는 사람들, 종북, 빨갱이, 계엄령 등 도무지 21세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들에 사로잡힌 그들을 폭민이라고 부른다면, 시대정신을 희석하고 촛불을 무시하고 세월호를 망각한 채 이번 대선을 그저 정당인들의 자연발생적인 정권 경쟁쯤으로 전락시키려는 언론은 도대체 어떻게 불러야 할까. 4.19혁명 이후를 그토록 아파하던 시인 김수영의 고뇌와 절망이 마치 오늘처럼 느껴지는 요즘이다.

매스 미디어랑 같이 보고 달리 말하기. 매일 물 한 바가지씩 마당에 붓는 마음으로 티비와 씨름하고 있다. ‘탁발의 티비 읽기’ http://artofdie.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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