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타나베 켄, 마츠야마 켄이치, 아야노 고, 모리야마 미라이, 츠마부키 사토시, 미야자키 아오이, 히로세 스즈. 가히 현재 일본 영화가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캐스팅이라 할만하다. 일본 최고 배우들이 뿜어내는 에너지도 강렬하지만, 이들을 한자리에 모은 이상일 감독의 만듦새 또한 훌륭하다. 국내에서는 제21회 부산국제영화제(BIFF) 갈라 프레젠테이션 부문에서 첫 공개되었던 영화 <분노>(2016) 이야기이다.

영화 <분노> 포스터

재일한국인 3세로 조선학교 교사인 아버지 밑에서 줄곧 조총련계 학교를 다녔던 이상일 감독은 일찌감치 일본영화계의 될성부른 나무였다. 일본 영화 학교 졸업작품인 단편 <푸를 청>(1999)부터 주목받기 시작한 이상일 감독은 이후 만드는 작품마다 성공을 거두며, 대중 친화적이면서도 섬세한 연출력을 인정받았다. 극영화의 입지가 점점 줄어들고 있는 일본 영화 시장에서 내놓는 작품마다 의미 있는 흥행을 거두는 이상일 감독 영화에 와타나베 켄, 츠마부키 사토시, 후카츠 에리, 카세 료, 오다기리 죠 등과 같은 일본 스타 배우들이 줄을 서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분노>는 <악인>(2010)에 이어 소설가 요시다 슈이치 작품과의 두 번째 만남이다.

<분노>가 기본적으로 취하는 장르는 미스터리 스릴러이다. 무더운 여름날 한 중년 부부를 잔인하게 살인한 남자가 혈서로 ‘분노’라는 글자만 남기고 종적을 감춘다. 1년 뒤, 요헤이(와타나베 켄), 유마(츠마부키 사토시 분), 이즈미(히로세 스즈 분) 앞에 각각 정체를 알 수 없는 세 남자가 나타나고 이들은 모든 것이 의문투성이인 사람에 대한 믿음과 의심을 반복하며 깊은 인연을 맺어 나간다.

범인은 타시로(마츠야마 켄이치 분), 나오토(아야노 고), 타나카(모리야마 미라이 분) 중에 있고, 이들 중 누가 범인인지는 영화를 끝까지 봐야 알 수 있다. 미스터리 장르물 성격을 취하는 만큼, 이들 중 범인이 누구인지 추측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그러나 범인이 누구인지 맞히지 못하더라도, 설령 범인 찾기에 관심이 없다고 해도, 이 영화를 즐기는 데 전혀 무리가 없다. <분노>는 범인이 누구인지 맞히는 것보다, 주변인을 의심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갈등, 불신, 분노를 심도 있게 파헤치고자 하는 심리 드라마적 요소가 강하다.

<분노>에는 얼핏 보면 전혀 연관성 없는 것 같은 세 개의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공통점이 있다면 이들 주변에 연고를 알 수 없는 수상한 남자가 나타났고, 등장인물들은 갑자기 자기 앞에 나타난 존재에 대해서 끊임없이 의심하거나 철석같이 믿어 버린다는 점이다.

영화 <분노> 스틸 이미지

첫 번째 이야기 주인공 요헤이는 한때 유흥업소에 일했던 딸 아이코(미야자키 아오이 분) 주변에 얼쩡거리는 타시로(마츠야마 켄이치 분)가 영 못미덥다. 타시로의 신원이 확실하지 않는 것도 의심스럽지만, 마을 사람들이 다 수군거리는 아이코의 과거를 알면서도 자기 딸을 좋아하는 게 꺼림칙하다.

두 번째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유마는 도쿄에 살고 있는 성소수자이다. 주변인들은 물론, 죽음을 앞둔 어머니에게도 게이임을 숨기는 유마는 신주쿠 게이바에서 우연히 만난 나오토(아야노 고 분)에게 한눈에 반하고 둘은 곧 연인 사이로 발전한다. 나오토를 사랑하지만, 유마는 자신에 대해서 도통 이야기를 하지 않으려는 나오토의 존재가 의심스럽다.

앞서 등장한 인물들과 달리 오키나와 섬마을에 살고 있는 고등학생 이즈미(히로세 스즈 분)와 타츠야(사쿠모토 타카라 분)은 무인도에서 만난 배낭여행객 타나카(모리야마 미라이 분)의 존재를 철석같이 믿어 버린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에게 쉽게 마음을 주고 상대에게 강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 있어서 첫 번째 에피소드에 등장한 아이코와 비슷한 이야기를 보여줄 것으로 예상되었지만, 이들이 맞이하게 된 운명은 달랐다.

영화 <분노> 스틸 이미지

<분노>의 원작소설을 집필한 요시다 슈이치는 한 신문에 <분노>를 연재할 당시 세 명의 용의자 중 누가 범인인지 확실히 정하지 않고 소설을 집필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심지어 이야기가 후반부에 돌입했을 때도 범인을 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소설을 영화로 각색한 이상일 감독의 고민 또한 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분노>는 세 명의 용의자 중 누가 범인인가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연관성은 전혀 없어 보이지만 하나의 공통된 사건으로 와르르 무너져 버리는 인간의 본성에 주목하고자 한다.

“믿었기 때문에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상대방에게 아무런 의심 없이 쉽게 마음을 내준 탓 일까.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를 너무 믿었던 <분노>의 주인공들은 뒤늦게 알게 된 연인 혹은 친구의 존재, 혹은 그들을 끝까지 믿지 못한 자신에게 배신감을 느끼고 격한 분노를 토한다. 부조리하게 흘러가는 현실에서 화를 내는 것 외에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어 보인다.

영화 <분노> 스틸 이미지

참는 것에 한계를 느낀 <분노>의 주인공들은 자신을 속인 타인에 대한 분노, 자신에 대한 분노, 사회에 대한 분노를 마구 쏟아낸다. 인간들 사이에서 흔히 벌어지는 믿음과 불신, 배신을 다루면서도 현 일본 사회에서 벌어지는 여러 문제점들을 극적으로 부각시켜 관객들이 인식시키는 스토리텔링 기법이 돋보인다. 여러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캐릭터 하나하나가 허투루 소모되지 않는 영화 연기 연출법과 배우들의 열연도 영화의 감동을 한층 배가한다.

이렇게 대중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작품성까지 갖춘 수준급 상업영화이지만, 안타깝게도 한국 극장에서 <분노>를 관람할 수 있는 기회는 제한적이다. <분노>를 상영하는 극장도 전국에 백 개 안팎에 불과하고 이마저도 대부분 교차 상영이다.(4월 1일 기준 <분노> 상영 스크린수는 96개로 <프리즌>의 906개와 무려 10배 가까이 차이가 난다. 영화진흥위원회 입장권통합전산망 기준). <분노>를 보고 싶다면, 상영 극장과 시간표를 일일이 확인하여 찾아가는 일종의 수고가 필요하다. 한국의 기형적인 스크린 독과점 현상 때문에 <분노>를 찾아서 보는 게 쉽지는 않겠지만, 기회가 되면 이 영화가 이룩한 놀라운 영화적 성취를 극장에서 확인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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