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30대, 40대가 추천하는 책 리뷰가 이번 말랑미디어 주제란다. 이런 과분한 데가... 엉겁결에 ‘민주주의를 혁명하라’(김영수.메이데이)라고 말해버렸다.

과반수는 다수를 결정하는 데 보편적이면서도 손쉬운 방법이다. 어느 한 쪽이 일방적으로 우세하게 결정하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서로 의견의 비중이 비슷한 상황에서는 과반수 결정방식이 등장한다. 의사결정의 주체들을 대부분 홀수로 구성하는 것이나 우리 나라 국회의원 총수가 299명인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결정적인 순간에 발휘되는 캐스팅보트 역할을 하는 한 사람은 다수의 힘을 좌우한다. 만약 3개의 정당이 국회를 구성하고 있는 상황에서 2개 정당의 국회의원 수가 각각 149명 동수이고 나머지 1개 정당의 국회의원이 1며일 경우에 문제가 발생한다. 국회의원 총회에서 그 1명의 국회의원이 어떻게 결정하느냐에 따라 법률의 향방이 결정된다. 입법권의 절대적인 힘을 1명의 국회의원을 보유한 정당이 가진다.

▲ '민주주의를 혁명하라.' 김영수 경상대 연구교수. 메이데이
정적인 순간에 발휘되는 캐스팅보트 역할을 하는 한 사람은 다수의 힘을 좌우한다. 만약 3개의 정당이 국회를 구성하고 있는 상황에서 2개 정당의 국회의원 수가 각각 149명 동수이고 나머지 1개 정당의 국회의원이 1며일 경우에 문제가 발생한다. 국회의원 총회에서 그 1명의 국회의원이 어떻게 결정하느냐에 따라 법률의 향방이 결정된다. 입법권의 절대적인 힘을 1명의 국회의원을 보유한 정당이 가진다.

정적인 순간에 발휘되는 캐스팅보트 역할을 하는 한 사람은 다수의 힘을 좌우한다. 만약 3개의 정당이 국회를 구성하고 있는 상황에서 2개 정당의 국회의원 수가 각각 149명 동수이고 나머지 1개 정당의 국회의원이 1며일 경우에 문제가 발생한다. 국회의원 총회에서 그 1명의 국회의원이 어떻게 결정하느냐에 따라 법률의 향방이 결정된다. 입법권의 절대적인 힘을 1명의 국회의원을 보유한 정당이 가진다.

이러한 현상이 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어떻게 1명이 298명보다 정당할 수 있느냐는 의식이다. 그 반대의 상황도 발생할 수 있다. 각각 149명의 국회의원을 보유한 2개의 정당이 문제투성이인 법률을 놓고 서로 싸울 수 있다. 이때 1명의 국회의원이 다수의 힘으로 밀어붙이는 악을 저지할 수 있는 경우이다.

뭔가를 선택하는 데 선과 악으로 구분하는 방식 자체가 보편화되고 있다. 정말 고리타분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다수가 결정하면 곧 선이고 소수는 악이고 오류인 것처럼 여겨진다. 그런데 이분법적인 판단의 굴레를 벗어나는 순간 다수가 항상 선인 경우도 없지만 소수도 항상 선일 수 없다. 문제는 다수가 항상 선으로 인정되는 의사결정방식이다. 의사결정방식이 과반수라는 사실만을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과반수 의사결정도 선을 결정할 수도 있고 악을 결정할 수도 있다. 결정하는 내용이 국민주권을 실현하는가의 여부에 따라 선과 악으로 규정될 뿐이다. 그렇다면 과반수는 국민주권을 실현하는 데 유용한 의사결정방식인가의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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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주권 실현에 실질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대표를 선출하고 그 대표들의 대표성을 강화시킬 수 있는 의사결정방식이 존재한다. 대표자의 대표성을 강화시키기 위해 모든 선거에서 전체 유권자의 1/2 혹은 2/3 이상의 득표를 했을 경우에만 당선시키는 방안이다.

이를 위해서는 각종의 선거에서 여러 번 투표해서 결정해야만 할 것이고 투표도 하루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며칠 동안 투표하는 방안도 고려해야만 할 것이다.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을 특별결의방식(유권자의 2/3 이상)으로 선출하여 대표자들의 대표성을 강화시키는 대신에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에 대한 탄핵소추나 제명을 1/3 이상의 결의로 하게 하면 된다.

대통령 탄핵 소추 및 국회의원 제명 권한도 국회위원에게만 부여되는 것이 아니라 국민에게도 부여할 수 있다. 전체 유권자의 1/3 이상이 탄핵소추나 제명에 서명하거나 동의하면 직무를 정지시키고 국민이 직접선거로 결정하는 것이다. 탄핵이나 제명의 권한을 국민이 가지고 있는 이상, 한번 선출되었다고 거드름 피우는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은 없어질 것이다.

‘민주주의를 혁명하라’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김영수 선생은 과반수 다수결 문제에 의문을 달고 더 좋은 의사결정방식이 없는가를 살폈다. 김영수 선생의 제안대로 하려면 헌법, 선거법, 국회법 등 관련 법률의 관련 조항을 죄다 바꿔야 한다. 관련 법률의 관련 조항을 바꾸려면 다시 현행 법률이 규정하는 의결 방식을 따라야 하는 문제가 생기는데, 이렇게 하자면 정말 민주주의를 혁명해야만 가능하다.

사람들은 곧잘 상상력의 혁명 또는 혁명적 상상력에 대해 현실성이 없다는 이유로 냉대하곤 한다. 하지만 굳어 박제처럼 되어버린 현실을 바꿔낼 마뜩한 방법이 없다는 현실을 깨닫는 순간 쉬 절망하곤 한다.

멀리 보자면 1백년 전부터 비근하게는 10년 전 또는 바로 엊그제까지 한국사회는 줄기차게 민주주의를 희구해왔다. 그리고는 어느 시점에선가 시민들은 스스로 만들고 누려온 민주주의의 족쇄에 갇혀버렸다. 오늘날 절차민주주의가 시민들의 민주주의적 삶을 역규정하는 사건, 사고들은 도처에 널려 있다. 유권자 과반에 가까운 지지를 얻은 이명박 대통령과 개헌 저지선을 무너뜨린 보수 성향의 국회의원 당선자들이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행사하는 유무형의 폭력들. 입법, 사법, 행정을 관통하는 권력의 작동 메카니즘과 그 효과들... 1월19일의 참사와 7월22일의 희극과 10월29일의 비극...

KBS 사장은 제적 과반수 출석에 과반수 득표로 선출한다. KBS노조 등이 특별다수제(2/3 이상)로 사장을 선출하자고 요구했으나 이사회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사회 정관을 바꾸는 일인데 다수가 반대하니 뾰족한 수가 나질 않았다. 김인규 씨는 제적 인원 11명 중 과반수인 6명의 표를 얻어 KBS 사장으로 임명제청됐다. 여기서 민주주의를 물으면 어떤 응답이 가능할까.

그러니까 지금 ‘민주주의를 혁명하라’는 선동이 아니다. 앞으로 어떤 민주주의를 하며 살아갈 것인지를 묻는, 회피할 수 없는 질문인 셈이다. ‘민주주의를 혁명하라’를 읽으면 이루 말할 수 없이 비현실적인 상상의 세계로 빠져들게 되는데, 어느 대목에선가 정신이 퍼뜩 들거나 하면 그런 게 하나의 실마리가 되지 않겠나 싶다.

다만 한국사회 40대 이상의 머리는 대체로 바닥을 보였으니 욕심을 부리지는 말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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