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는 정말 다양한 나라의 이주노동자들이 일하고 있다. 한국 정부와 아시아 16개 국가 간의 MOU를 맺고 대표적인 이주노동자 도입제도인 고용허가제를 통해, 한국어능력시험으로 이주노동자들을 선발하고 있다. 그 외에도 예술흥행, 특정 활동, 회화지도 등 다양한 비자타입에 따라서 아메리카, 아프리카, 유럽 등에서 이주노동자들이 들어오고 있다.

이주노조에서 일하면서 오며가며 다양한 국적의 이주노동자들을 만나게 된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이름의 나라도 있었고, 가끔씩 그 나라의 음식이나 노래를 접하게 될 때면 한번쯤은 꼭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 적도 있었다. 그래서 활동 5년차를 맞이했던 2016년부터 1년에 한번 이상은 이주노조 조합원들이 있는 나라를 방문해보자는 야심찬 프로젝트를 나 홀로 세우고 실행에 들어갔다. 2016년 필리핀, 네팔을 시작으로 2017년 방문국가는 방글라데시로 정했다. 여기에 이주노조 수석부위원장이자 영화감독인 섹알마문 동지와 함께한 열흘간의 기록을 담아보고자 한다.

히말라야 트래킹으로 유명한 네팔이나 한국과 지리적으로 가까워 관광지로 알려진 필리핀에 비해서 인도 북동쪽에 위치한 방글라데시는 상대적으로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느낌이었다. 내가 알고 있던 이미지는 2013년에 일어난 라나 플라자 사건1)에서의 충격과, 방글라데시 조합원들과 함께 먹었던 방글라데시 음식(브리아니, 사모사, 미스티 등)과 몇 가지 인사말 정도였다. 그런데 20대 시절에는 준비가 안 되면 해외에 나갈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이 컸는데 몇 번 들락날락 하고나니 일단 가면 어떻게든 되겠지 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생겼다. 무엇보다 지난 1월에 귀국한 방글라데시 조합원 아짐과 예전 평등노조 이주지부 시절의 이주활동가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설렘이 더 컸다.

태국 방콕을 경유하여 반나절을 넘게 날아간 다카(방글라데시 수도)의 첫 인상은 정말 모든 것이 어마어마하게 많다는 것이었다. 도로 위를 달리는 릭샤(인력자전거), 소형택시, 자동차, 오토바이, 버스들 사이를 오고가는 수많은 사람들까지. 고백컨대 한국에서 무단횡단을 해본 경험이 있었지만 도저히 함부로 건널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거의 매순간 울리는 경적소리와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소리, 무슬림사원에서 기도하는 소리(대부분의 국민이 무슬림인 방글라데시인 만큼 하루 5번 기도를 해야 하는데 그때마다 무슬림사원에서 기도하라는 방송을 틀어준다)까지 겹쳐져서 이틀 정도는 가까운 거리를 오고가는 것마저도 상당히 긴장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사람은 환경에 적응하는 동물이라고, 아늑한 숙소를 제공해준 방글라데시 예술가 사이풀 자날(Saiful Jarnal)씨와 Azmain Azad Katha 부부 덕분에 몸과 마음이 매우 편해졌다. 자날 씨는 줄루툴이라는 예술단체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이곳은 학교를 가지 못하는 아동들을 대상으로 인형극과 예술공연 등을 하면서 활발한 문화활동을 하고 있었다. 이 사무실에서 예전 평등노조 이주지부 활동가이자 명동성당 농성의 주역이었던 쟈이드 동지를 만났다. 방글라데시에서 방송국 PD로도 일했던 쟈이드 동지는 매우 유창한 한국어 실력으로 방글라데시 문화, 역사, 종교, 정치 등을 넘나들면서 현지 가이드 역할을 제대로 해주셨다.

방글라데시 3.8 세계 여성의 날 집회

덕분에 방글라데시 현지에서 열리는 3.8 세계 여성의 날 집회에도 참석할 수 있었다. 다카대학 앞에서 열리던 3.8 여성의 날 집회에는 수십여 명의 여성단체 회원들이 일렬로 늘어서서 구호를 외치거나 연설을 하고 있었다. 흥미로운 것은 집회 한편에 ‘여성들을 위한 남성행진’이라는 제목을 단 플랜카드를 들고 방글라데시 남성들도 3.8 세계 여성의 날 집회에 연대를 하고 있는 점이었다.

이들의 주요 주장은 여성에 대한 성폭력 반대, 성폭력 없는 사회에서 아이를 키우고 싶다, 18세가 되기 전 조혼하는 것에 대한 반대, 여성들 스스로 자긍심을 가지고 행진하자 등등으로, 방글라데시에서 여성으로서 살아가면서 겪는 문제들을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하자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이 집회가 열리는 다카대학은 한국으로 치면 서울대와 같이 방글라데시에서 가장 큰 대학 중 하나이고, 실제로 방글라데시가 파키스탄으로 독립하는 과정에서 매우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학생운동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또한 매해 2월 21일은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국제 모국어의 날인데 방글라데시 독립투쟁에서 그 유래가 시작되었다고 했다. 1952년 2월 21일 당시 동파키스탄(현재 방글라데시)의 다카대학에서 파키스탄 총리가 우르두어(현재 파키스탄어)를 공식적으로 사용하고 벵골어(현재 방글라데시어)사용을 금지하려고 하자 이에 항의하는 다카대학 학생 시위대를 대상으로 파키스탄 경찰이 발포를 하여 4명이 사망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 이후 20년간 독립운동이 지속되었고 마침내 방글라데시가 1971년 파키스탄으로부터 독립을 하고 벵골어가 공식 언어로 채택되게 되면서 이를 기리기 위해 국제 모국어의 날로 2월 21일을 지정하였다고 한다. 쟈이드 동지에게 위와 같은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때 당시 방글라데시 학생운동의 핵심 활동가들이 모였던 다카대학 카페에 직접 가보기도 하고 곳곳에 붙어있는 선전 포스터를 보면서 한국의 4.19나 5.18, 6월 항쟁처럼 불의에 맞선 학생들의 투쟁이 어느 나라에나 있었음을 떠올렸다.

방글라데시 3.8 세계 여성의 날 집회

방글라데시에 있는 동안 수도 다카를 떠나서 북동쪽에 위치한 실렛이라는 지방을 1박2일 일정으로 방문했다. 숙소를 제공해준 자날 씨의 고향이기도 한 이 지방은 예전부터 넓디넓은 차밭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이곳에는 공동으로 차밭 농사를 짓기 위해서 공동숙소 등을 만들어 함께 살아가고 있는 마을주민들이 많았는데 최근 경제개발을 명분으로 정부의 강제철거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 전체 인구의 약 60퍼센트 정도가 강제이주를 해야만 했고 남은 40퍼센트의 주민들이 정부의 강제철거에 맞선 투쟁을 지속 중이었다.

마침 강제철거를 반대하는 마을 문화제가 열리고 있어 방문을 했는데 여러모로 신기한 경험이었다. 이곳 실렛 지방은 다카에서도 차로 8시간 이상 걸리는 시골이라서 한국인을 처음 보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일단 아이들은 신기한지 내 주변을 계속 서성였고 방글라데시 말로 인사를 건네면 까르륵 웃으며 도망가거나 같이 셀카를 찍자고 하는 경우도 있었다. 집회 중간에 구호라도 좀 따라해 보려고 나눠준 유인물에 한국어로 발음이 나는 대로 써서 다음과 같이 외쳤다.

“아말마티 아말마 (나의 땅 나의 엄마) 게르니티 디보나(빼앗길 수 없다!)”

서툰 발음으로 방글라데시어 구호를 외치는 나를 보며 많은 사람들이 웃었고, 그 뒤로 어디를 가든 이 구호를 외치면 사람들이 어디서 그런 말을 들었냐면서 웃었다는 이야기를 나중에서야 마문 동지에게 들었다. 2004년에 명동성당에서 1년 넘게 이주노동자 동지들이 농성투쟁을 할 때 한국어로 된 민중가요를 배우기 위해서 영어로 발음표시를 “민주노조(min ju no jo)”라고 썼다던데 흡사 내가 그런 셈이었다. 한국에서 이주노조 조합원들과 촛불집회나 노동자대회 등에 가면서 무작정 앞에서 하는 구호를 따라하라고 이야기했던 내 모습이 새삼 부끄러웠다.

녹차밭 강제 철거 반대 문화제

열흘간의 방글라데시 방문이 끝난 후 한국에 돌아온 지 2주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 사이에 헐었던 코도 많이 나아졌고, 매일같이 울리던 경적소리와 무슬림 사원의 기도소리도 핸드폰 속 영상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추억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난 벌써 베트남, 캄보디아, 미얀마 등등 다음 방문지는 어디로 정할지 행복한 고민을 하고 있다. 한국에 오는 이주노동자들의 본국을 모두 방문하는 그날까지, 조합원 가정방문 프로젝트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끝으로 오늘의 추천영상은 방글라데시의 유쾌한 예술가 Saiful Jaarnal(사이풀 자날)씨가 직접 만든 1인 9역의 악기 연주 영상이다. 다시 한 번 아늑한 숙소와 아낌없는 우정을 보여준 자날 씨에게 감사를 드린다.

1) 2013년 4월 24일 방글라데시 다카의 8층짜리 공장인 ‘라나플라자’의 노동자들이 건물 곳곳에 금이 가 위험하다고 항의하며 출근을 거부했다. 하지만 한 달 치 임금을 삭감하겠다는 관리자들의 협박에 어쩔 수 없이 공장으로 들어가 일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라나플라자는 무너져 내렸고, 공식 사망자 수 1136명, 부상자 2500명의 피해를 낳은 대참사를 불러일으켰다.

박진우_ 2012년부터 이주노동조합의 상근자로 일을 하고 있다. 어릴 때부터 대안학교 선생님을 하고 싶다는 막연한 꿈을 꾸고 있어서 언젠가는 이주아동 대안학교 선생님을 하겠다는 나름의 목표를 가지고 있다. 일을 한 지 5년이 되어가지만 부족한 외국어실력 탓인지 가능한 한국어로만 상담을 하고 있다. 이주노조 합법화 이후에 다음 역할이 무엇이 되어야 할지 고민 중이다. 건강한 몸과 마음을 만들기 위해 지속적인 노력을 하고 있다. 무엇을 하더라도 스스로 재미있게 살아갈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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