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석희 앵커의 눈동자가 여느 때보다 더 촉촉하고, 목소리는 더욱더 비장해 보였다. 하필 이날(20일) 앵커브리핑 주제도 '시청자 여러분께'였다. 풀어 말하면, 시청자 여러분께 전하는 JTBC 앵커이자 저널리스트 손석희의 고뇌와 다짐이라고나 할까.

브리핑 중간에 그는 "지난 주말부터, JTBC는 본의 아니게 여러 사람의 입길에 오르내렸습니다. 가장 가슴 아픈 건 저희가 그동안 견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왔던 저희의 진심이 오해 또는 폄훼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라고 토로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단언했다.

"저희가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명확합니다. 저희는 특정인이나 특정집단을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시대가 바뀌어도 모두가 동의하는 교과서 그대로의 저널리즘은 옳은 것이며 그런 저널리즘은 특정인이나 특정집단을 위해 존재하거나 복무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손 앵커는 상기한 짧은 문장에서 "(저널리즘은) 특정인이나 특정집단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을 두 번이나 반복했다. 왜 그랬을까? 아니, 왜 그래야 했을까? 어쩌면 이것이 오늘의 앵커브리핑이 나오게 된 배경과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닐까?

JTBC 뉴스룸 [앵커브리핑] '시청자 여러분께'

그는 앵커브리핑 앞 문장에서,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 사이에서 갈등, 고민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비판과 생존의 함수관계에서 허덕일 수밖에 없는 언론사의 운명을 두루뭉술하게 언급했다. 해서 이 말만으론 그가 누구 혹은 무엇을 의식하고 그리 말했는지 단정하기 쉽지 않다.

다만 미루어 짐작컨대, 손석희 사장으로 하여금 앵커브리핑 시간을 이용해 저널리즘의 길을 다시금 되새기고 각오하게 할 만한 중대한 상황변화가 JTBC 주변에서 일어난 것이 아닐까 의심할 뿐. 이런 의심을 더욱 공고히 해주는 대목이 저널리스트로서 불퇴전의 각오를 피력한 앵커브리핑 마지막 문장이다.

"저나 기자들이나 또 다른 JTBC의 구성원 누구든. 저희들 나름의 자긍심이 있다면, 그 어떤 반작용도 감수하며 저희가 추구하는 저널리즘을 지키려 애써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비록 능력은 충분치 않을지라도, 그 실천의 최종 책임자 중의 하나이며, 책임을 질 수 없게 된다면 저로서는 책임자로서의 존재 이유를 찾기 어려울 것입니다."

'어떤 반작용도 감수하고 저널리즘을 고수하겠다. 그게 안 되면 책임지겠다'는 그의 말은 받아들이기에 따라선 JTBC를 떠날 수도 있다는 말로도 읽힌다. 그게 아니라면 '최종 책임자' 운운하며 '책임을 진다'는 말까지 입에 담을 필요가 있었을까.

이쯤에서 손 앵커의 말을 다시 음미해 보자. 그가 브리핑에서 한정한 기간은 "지난 주말부터"이고, 그를 당혹케 했던 일은 "JTBC가 본의 아니게 여러 사람의 입길에 오르내렸다"는 것이다. 이것을 토대로 보다 구체적으로 추론해 보자,

JTBC 뉴스룸 보도 화면 갈무리

지난 주말부터 JTBC가 여러 사람의 입길에 오르내리게 된 건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전진배 주말앵커가 문재인 전 대표의 '전두환 표창장 발언'을 소개하면서 그 앞에 '반란군 우두머리'란 말을 빼고 보도함으로써 마치 문 전 대표가 전두환에게 표창장 받은 것을 자랑스러워하는 듯한 뉘앙스를 풍겼고 그로 인해 의도치 않은 공격을 받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당장 국민의당이나 바른정당으로부터 비난이 쏟아졌고 심지어 같은 당 출신의 안희정 지사나 이재명 시장조차 '전두환 표창장'을 물고 늘어지며 문재인과 호남을 이간질하는 네거티브 총공세를 펼치기에 이르렀다. 문 전 대표 측에서는 이를 반박하느라 바빴고, 몹시 소란스러웠던 지난 주말 풍경이 이러했다.

사실 이것은 JTBC가 "제가 전두환 여단장으로부터 표창장을 받기도 했습니다"란 자막 위에 "그때 그 반란군의, 말하자면 가장 우두머리였는데"란 한 줄만 첨가했어도 전혀 문제가 없었을 일이었다. 그런데 우연한 실수인지 아니면 의도된 편집인지, 문 전 대표의 호남 구애에 큰 상처가 될 수 있는 자막을 내보냄으로써 문 지지자들에게 격한 원성을 사고 말았던 것.

그러나 문 지지자들에게 아무리 욕을 먹었기로서니 겨우 이런 문제 때문에 손석희 사장이 나서서 앵커브리핑을 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문재인 논란이라면 굳이 언론의 '공정 영역'이나 '사적 영역' 같은 표현을 삽입할 필요도 없었을 테니까.

중앙일보와 JTBC의 홍석현 회장이 사임하기로 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생각할 수 있는 다른 하나는 지난 주말 중앙일보 JTBC 회장직에서 사퇴한 홍석현의 대선 출마설이다. 홍석현이 대통령 선거에 나설지도 모른다는 뉴스로 지난 주말 정치판이 떠들썩했고, 그것은 손석희가 사장으로 있는 JTBC에도 허리케인 이상의 엄청난 충격이 됐을 거란 건 불을 보듯 뻔한 사실.

게다가 이날 <뉴스룸> 이후에 진행되는 소셜라이브에서도 홍석현 관련 소식이 주메뉴였다. 이를 보더라도 문재인 건보다 홍석현 출마설과 앵커브리핑을 연결시키는 것이 훨씬 합리적이지 않나? 그리고 이렇게 이해할 때라야 어떤 반작용을 감수하고라도 저널리즘 정도를 걷겠다는 손석희의 비장한 각오가 한결 절박하게 피부에 와 닿는다.

듣자니, 홍석현 사퇴 후 친박단체 일각에서 박근혜 탄핵을 촉발한 JTBC의 태블릿피시 보도가 결국 사주의 대선 출마를 위한 것 아니냐는 음모론이 기승을 부렸다고 한다. 손석희가 앵커브리핑을 통해 "가장 가슴 아픈 건 저희가 그동안 견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왔던 저희의 진심이 오해 또는 폄훼되기도 한다는 것"이라고 토로한 것도 그 때문이 아니었을까.

JTBC 회장이었던 홍석현이 만약 대선에 출마하거나 킹메이커 역할을 하려 든다면, JTBC <뉴스룸> 앵커이자 보도부문을 총괄하는 손석희 사장으로선 무척이나 곤혹스러울 게다. JTBC 뉴스의 중립성이 의심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그와 JTBC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손 앵커가 앵커브리핑 말미에 '책임자로서의 존재 이유'를 끼워 넣은 것도 어쩌면 그와 무관치 않을 터다.

JTBC 뉴스룸 [앵커브리핑] '시청자 여러분께'

앞서 말했듯이 손석희는 "(저널리즘은)특정인이나 특정집단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을 두 번이나 반복했다. 손석희가 경계한 '특정인'이나 '특정집단'은 문재인이나 민주당도 될 수 있고 홍석현이나 중앙일보.JTBC도 될 수 있다. 차라리 그가 경계하는 대상이 정치권력이라면 더 싸우기 쉬우련만.

손석희가 MBC에서 JTBC로 자리를 옮겼을 때, 많은 이들이 중앙일보와 밀접하게 연관된 삼성을 제대로 비판할 수나 있겠느냐고 우려했었다. 지금은 그때보다 상황이 훨씬 극악하다. 그가 몸담고 있는 언론사 내부 문제와 편파성을 의심하는 외부의 사시에 맞서 안팎으로 힘든 고난의 길을 걸어야 하기 때문이다.

손석희는 자신을 JTBC로 영입한 홍석현으로 인해 진퇴를 결정해야 하는 크나큰 시험대에 올랐다. 그는 과연 JTBC에서 언론인으로서의 자긍심을 지키며 <뉴스룸>을 계속 진행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책임을 질 수 없는 비상한 상황에 몰리게 될 것인가. 날이 갈수록 온도를 높여가고 있는 대선판과 더불어 언론인 손석희의 행보에 사람들의 시선이 쏠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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