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인생에서 몇 번의 기회가 있다고 했다. 아마도 고아성에게 이번 드라마 <자체발광 오피스>가 그중 매우 중요한 한 번이 될 것 같다. 경쟁작들이 모두 넘기 힘든 산이라 시청률이 어떻게 될지 아직은 미지수지만, 적어도 고아성이 이번 드라마에서 보이는 연기는 결코 뒤지지 않는 힘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2015년 어린 엄마 역할을 할 때의 당돌함을 훌쩍 넘어선 치밀하고 섬세한 감정 표현이 하도 뛰어나서 그저 고아성만 보고 있어도 한 시간이 언제 지나가는지도 모를 지경이다. 마치 작년 <또 오해영>에서의 서현진의 원맨쇼를 보는 것만큼의 몰입과 황홀을 느끼게 된다.

MBC 새 수목 미니시리즈 <자체발광 오피스>

앞으로는 시선이 좀 더 넓게 펼쳐지겠지만 초반부를 거의 고아성 혼자서 다 끌고 가는데도 전혀 무리가 없어 보인다. 그만큼 캐릭터도 탄탄하고, 그것을 표현하는 고아성의 연기도 완벽하다. 지칠 때도 아니지만 전혀 지칠 기색도 없다. 심지어 외모조차도 은호원과 너무 잘 맞는다. 물론 그것은 모든 드라마 여주인공에게 우리가 기대하는 청순가련과 러블리함. 식상하게도 그것에 불과하겠지만.

어쨌든 100번의 입사에 실패한 취업준비생의 처절함은 현실 이상으로 드러내면서도 이것이 다큐나 르뽀가 아닌 드라마, 그것도 로코에 가까운 드라마인 것을 잊지 않고 상기시켜준다. 시한부라는 설정은 아직 확정된 것도 아니고, 궁극적으로 사실도 아니겠지만 그 비극적 설정이 이상하게 코믹하게 전달되는 묘한 역설 속에서 고아성은 90년대 멜로드라마처럼 비극적인 동시에 21세기 로코 주인공다운 사랑스러움이 넘친다.

그러면서도 문득 던지는 대사 한 마디가 그만 무릎에 힘을 잃고 땅바닥에 주저앉을 정도로 독하다. 예를 들어 진상 고객을 처리한 후에 비결을 묻는 회사 동료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별 거 있나요. 무릎이 좀 싸면 돼요”하면서 오히려 웃는다. 고객 앞에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먼저 무릎을 꿇은 은호원이었다.

MBC 새 수목 미니시리즈 <자체발광 오피스>

첫 방송에서 식당 아주머니가 했던 대사도 예사롭지 않았다. “사람들 다 저승사자 (하나씩은) 문 밖에다 세워놓고 사는 거야. 사는 게 별 거 있어?”라던 대사가 참 강렬했다. 이 드라마 대본을 쓰고 있는 정회현 작가가 지난해 공모전에 입상했다고 하던데, 신인작가치고는 대사의 힘이 만만치 않더니 상당히 문제적 장면을 곳곳에 배치하고 있다.

결국 드라마라는 것이 다 끝난 후에도 남는 것은 명대사 몇 개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매 회 한번 이상의 인상적인 대사를 남기는 이 신인작가에 대해서 좀 더 주의를 기울일 필요는 충분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작가와 배우에 대한 흥미와 호기심이 생기게 되는 경우가 요즘 그다지 흔치 않은데 <자체발광 오피스>는 왠지 잘못 지은 것만 같은 제목이 주는 어색함과 달리 점점 기대감을 키워주고 있다.

누군가는 이 드라마 속 은호원에 대해서 ‘여자 장그래’라는 말도 하기도 하는데, 아닌 게 아니라 똑같은 미생들 중에서도 좀 더 미생이라 할 수 있는 여자 장그래의 캐릭터도 분명 필요한 것은 맞다. 고아성과 신인작가 정회현이 그것을 해낼지 지켜볼 일이다.

매스 미디어랑 같이 보고 달리 말하기. 매일 물 한 바가지씩 마당에 붓는 마음으로 티비와 씨름하고 있다. ‘탁발의 티비 읽기’ http://artofdie.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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