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일부터 단식을 할 거라고 들었습니다. 국회 재논의를 요구하고 언론악법의 시행을 막기 위해서이더군요. 그러나 하지 마세요. 실효성도 없고, 감동도 없고, 도움도 안되고, 배만 고픕니다.

단식, 실존의 절박한 선택이라는 점을 모르지 않습니다. 실존적 사건이죠. 실존이 겪는 불편부당함을 견디지 못해 국가와 사회를 향해 요구를 내걸고 자해를 감행하는 하나의 방편입니다. 언론노조 위원장이라는 실존이 헌재 판결을 보며 궁리 끝에 선택한 일이겠지요. 그런데 국가와 사회는 단식하는 사람을 구경꾼의 시각으로 바라볼 뿐이며 그 방관과 냉소의 경향은 과거보다 훨씬 커졌습니다. 게다가 좀 가까이 있는 사람들한테는 신경만 더 쓰이게 하고 불편하게 할 뿐입니다. 말은 안 하지만 짜증스럽게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단식을 하지 마세요.

'오죽하면' 이라는 말을 붙이곤 합니다. 저항의 수단과 방법으로 이것저것 할 만한 것 다 해봤지만 효과가 없어 오죽하면 단식을 한다고 합니다. 머리도 깎고 만배도 하고 삼보일배도 합니다. 그런데 실존이 겪는 불편부당함만 해도 화가 치밀진대 그 지점에서 왜 '오죽하면' 이라는 자기학대적인 결론을 유도하는 단어를 가져다 붙입니까. 오죽하면 하냐며 시작한 단식으로 실존이 겪는 불편부당함을 해결해낸 사례가 있으면 하나라도 예를 들어봐 주세요. 없죠? 그러니 단식을 할 거면 차라리 아무 것도 하지 말고 그냥 참으세요.

▲ 헌법재판소 앞에서 일만배를 하고 있는 언론노조 최상재 위원장ⓒ송선영

지율스님처럼 하시게요? 물론 아니겠죠. 천성산의 환경평가를 요구했다는 점에서 국가와 사회를 향한 실존의 저항임은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도룡뇽의 생명과 자신의 생명을 일체로 생각하며 종교적 경지를 향했다는 점에서 맥락이 다릅니다. 정치권도 환경운동도 시민사회도 도룡뇽을 살리지 못한다는 걸 인지한 실존의 절박한 선택이었습니다. 정말 지율스님처럼 따라할 생각이라면 말리지 않겠습니다만 언론악법은 그렇지 않습니다. 조직된 힘으로 얼마든지 많은 싸움을 할 수 있습니다.

최상재 위원장은 세 차례 파업을 벌였고 매 파업마다 성공적인 성과를 보여주었습니다. 지난 7월 총파업투쟁의 성과는 압권이었습니다. 언론당사자의 파업투쟁으로 현실 정당정치가 얼마나 후진가를 적나라하게 폭로해주었으니까요. 말렸습니다만 만배를 감행했죠. 어 아닌데 하는 순간 아뿔사 이미 시작해버렸고 결국 헌재 판결이 있던 날 오전에 기어이 만배를 채웠더군요. 만배의 효과였을까요. 헌재는 절차는 위법, 효력은 유효라는 억지 판결이 나왔습니다. 승리적 논평도 패배적 논평도 모두 가능한 우스꽝스런 판결이었습니다.

헌재 판결이 나던 날, 언론노조는 판결문의 행간을 자세히 읽고 입장을 표명했더군요. 언론연대, 문화연대, 민변 등 단체들과 대부분 언론들이 ‘절차는 위법이나 효력은 유효’라는 헌재 판결 결과를 논평하고 보도할 때 언론노조와 최상재 위원장은 ‘헌재는 위법 판결을 내렸고 국회로 공을 돌린 것으로 이번에도 승리했다’는 입장을 취했습니다. 승리의 관점에서 헌재 판결을 풀이한 것으로 읽었습니다.

재판관 한명 한명의 판결을 쫓아보면 3:3:3(신문법), 6:1:2(방송법)로 다양한 견해를 구분할 수 있습니다. 다툼의 여지가 있고 얼마든지 다툴 일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건 헌재는 과반의 룰에 따라 6:3 7:2로 효력정지가처분을 기각했다는 사실입니다. 문제는 헌재가 누구의 손을 들어주었느냐에 따라 승리와 패배를 말하기 앞서 미디어법을 처리한 헌재는 누구였으며 헌재의 미디어법 판결의 정치적 의미가 무엇인가를 정확히 보는 일이 우선 돼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세 가지를 잘 살펴볼 일입니다. 첫째, 87년 헌법의 산물인 헌재가 절차에 어긋난 미디어법을 유효하다고 판결했다는 것, 둘째, 그 판결에 현실 정치가 종속되어 있다는 것, 셋째, 그 현실 정치에 언론당사자로 존재하며 저항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최상재 위원장은 첫째에 있어 승리적 해석을 내렸고, 둘째에 있어 국회 재논의를 호소하고 있으며, 셋째에 있어 단식을 감행하려 하고 있습니다. 어째 뭔가 부자연스럽지 않습니까. 최상재 위원장의 단식은 최상재 위원장 자신이 결정하는 게 아니라 단식을 선택하게끔 강제하는 구조적인 힘 같은게 느껴지지 않느냐는 말씀입니다. 만배에 이어 단식까지 무엇이 최상재 위원장을 자기학대라는 극단의 결심으로 이끄는지 한번 물어볼 때가 되지 않았을까요.

▲ 전국언론노조 최상재 위원장이 지난 7월27일 오전 7시 30분 경기도 파주 교하읍 자택 앞에서 긴급 연행됐다. 사진은 연행 당시 최상재 위원장의 둘째 딸이 촬영한 사진 ⓒ 언론노조

지금 시점에 최상재 위원장이 언론당사자로서 스스로 단식을 결정하는 것이라면 어떤 수순이 될까요. 우선 헌재에 종속된 현실 정치의 종속성을 폭로할지 말지를 생각하게 될 겁니다. 그리고 헌재가 87년 헌법정신을 어겨가며 미디어법을 인정한 판결에 분개하게 될 거고요. 다음으로는 이 미디어법이 언론당사자와 국민에게 가져다줄 피해를 막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 지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접근해도 단식이라는 전술을 선택하게 될까요?

최상재 위원장의 이번 단식 결심에는 세 차례 총파업, 연행과 단식, 만배에 이은 것으로 누구도 함부로 말하기 힘든 엄숙함과 경건함이 있습니다. 그러나 엄숙하고 경건해지려고 단식을 하는 건 아닐 테니, 단식을 하지 마세요.

단식 대신 호흡을 가다듬고 위원장으로서 무엇에 집중하는 것이 좋은지를 돌아보는 시간을 좀 가지세요. 설악산에 눈도 왔다는데 댕겨오시는 것도 나쁘지 않고 여의치 않으면 그냥 며칠 잠이라도 푹 주무세요. 만배로 이곳저곳 고장이 났을 텐데 어떻게든 쉬어줘야 합니다.

공이 국회로 넘어간 이상 이제 민주당이나 야4당이 일을 하게 맡겨 두세요. 정당정치 당사자들이 더 이상 망신당하기 싫으면 뭐라도 하겠지요. 시민사회가 시시때때 마다 힘을 실어줘야 한다는 의무 따위는 없습니다.

다만 언론당사자로서 위원장의 책무는 분명히 해야 합니다. 한나라당이 입법하고 헌재가 인정해버린 미디어법은 미디어의 사유화를 의미합니다. 모든 피해는 국민에게 돌아오지만 일차적인 피해는 언론당사자들이 입게 됩니다. 언론당사자들이 개인과 해당 사업장부터 생각하는 각자도생의 거대한 파도에 휩쓸리지 않도록 맥을 짚어주고, 미디어의 사유화에 대처할 수 있는 힘다지기에 온 힘을 쏟으세요. 현장과 지부 사업장, 전국 각 지역 주민들을 만나러 다니고, 남는 시간에는 용산과 4대강에도 힘을 실어주세요. 만배나 단식보다 더 많은 체력과 정신노동을 요하는 일일지니, 그러니 부디 단식을 하지 마세요.

아함경에 나오는 거문고 이야기를 건냅니다. 부디 꽉 죄여놓은 거문고의 줄을 좀 풀어놓으시지요.

부처님께서 죽림정사에 계실 때였다. 소오나 존자는 쉬지 않고 선정(禪定)을 닦던 중 의문이 생겼다. ‘나는 부처님의 제자로 아직도 번뇌를 다 끊지 못했다. 애를 써도 이루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집에 돌아가 보시를 행하면서 복을 짓는 편이 낫지 않을까?’
이때 부처님은 소오나의 마음을 살펴보고 소오나 비구를 불러 말씀하셨다.
“소오나야, 너는 세속에 있을 때에 거문고를 잘 탔었다지?”
“네 그렇습니다.”
“네가 거문고를 탈 때 만약 그 줄을 너무 조이면 어떠하더냐?”
“소리가 잘 나지 않습니다.”
“줄을 너무 늦추었을 때는 또 어떠하더냐?”
“그래도 잘 나지 않습니다. 줄을 너무 늦추거나 조이지 않고 알맞게 잘 고루어야만 맑고 아름다운 소리가 납니다.”
“그렇다. 너의 공부도 그와 같다. 정진을 할 때 너무 조급히 하면 들뜨게 되고 너무 느슨하면 게으르게 된다. 그러므로 알맞게 하여 집착하지도 말고 방일하지도 말아라.”
소오나는 이때부터 항상 거문고 타는 비유를 생각하면서 정진하여 오래지 않아 아라한(阿羅漢)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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