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들이 게 맛을 알아?

게맛살이라는 이름의 상품은 사실 게살로 만들지 않았다. 그러나 맛과 냄새는 비슷하다. 그런데 최소한 한 마리에 십 만원이 훨씬 넘는 진품 영덕 대게를 먹어 본 사람은 그 맛이 뭔가 다르다고 한다. 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다르다고 한다. 진짜 대게와 게맛살의 차이는 그 맛을 느끼는 사람의 감각을 충족시켜주지만, 명품과 짝퉁의 차이에서도 이런 감각적인 차이가 있을까? 물론 그것은 감각적인 만족이라기보다는 보통 현시 가치나 기호 가치라는 이름으로 또 다른 차별적인 만족을 준다고 한다. 자본주의에서 본래적인 가치가 무엇인지는 여전히 이론적으로는 모호하더라도 양화된 가격으로 나타나는 교환가치는 확실하다. 향유할 수 있는 자와 그럴 수 없는 자를 사회적으로 차별화하고 차이를 재생산하여 다음 세대로 전승하게 한다. 그런데 대게든 게맛살이든 먹어도 그만, 안 먹어도 그만이다. 먹고 싶은 것을 먹으면 되고, 꼭 먹고 싶은 것이 비싸면 돈을 모아서 먹으면 된다.

대다수 사람들의 어린 시절의 추억이 먹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은 조금은 기이하기도 하지만, 아주 사소한 먹을거리가 사람들의 기억을 그토록 오래 지배한다는 점은 역시 인간이 동물이라는 사실을 증언해 준다. 동시에 먹을거리에 대한 기억은 가장 원초적인 정의의 감정을 형성하게 한다. 농담이긴 하지만 가부장적인 유교적 정의관의 문제점을 어린 시절 통닭을 먹으면서 보통은 경험한다. 형보다는 맛없는 것이지만 여동생보다는 맛있는 것을 먹는 것이다. 요즘이야 초등학생들이 학교 급식으로 똑같은 점심 식사를 하지만, 급식이 없었던 시절에 도시락 반찬은 지금의 사회적인 양극화 정도는 아닐지라도 사회적인 불평등의 정도를 대변할 수 있는 충분한 지표 정도는 되었던 적이 있었던 것 같다.

아무도 모른다

먹고 싶은 것을 먹지 못하는 상황을 생각하면 두 영화가 머리에 떠오른다. 하나는 <자전거 도둑>이라는 1940년대 이탈리아 영화이고 다른 하나는 2005년 개봉된 <아무도 모른다>라는 일본 영화다. <자전거 도둑>에서 도둑맞은 자전거를 찾으러 다니다 지쳐버린 아버지 리키는 아들 부르노를 데리고 식당에 간다. 식당 안에서 당당하게 모쪼렐라 빵을 먹던 부르노는 옆 테이블에서 말쑥하게 정장을 차려 입고 코스 요리를 먹는 동년배의 소년을 보고 동경과 더불어 좌절의 눈빛을 비친다. ‘먹고 싶지만 나는 먹을 수 없구나.’ 이미 사회적인 불평등을 감각적으로 학습한 부르노는 어른이 되어도 아마 그때를 오래 기억할 것이다.

<아무도 모른다>는 좀 더 암울한 이야기다. 유일한 보호자였던 엄마마저 떠나버린 네 남매가 편의점에서 유통기한이 지난 음식을 얻어서 끼니를 때우는 장면이 있다. 두 영화 모두 산업화된 사회에 걸쳐진 이면의 어둠과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삶의 불안정성이 생존에 필요한 음식을 중심으로 전개된다는 점에서 위험에 처한 생존을 더욱 생생하게 감각적으로 전달한다. 이렇게 맛있는 음식으로 흘러넘치고 그것도 모자라 그 비싼 음식들이 버려지는 세상에서 전 세계적으로 굶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 그것도 고도로 산업화된 사회에서도 절대 빈곤의 상태에 처한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걸 혹시라도 다른 혹성의 외계인들이 알게 되면 우리 지구인들은 조금 부끄러워질 것이다. 자본주의의 교환가치는 문화인이라고 자처하는 우리에게 여러모로 수치심을 낳게 한다.

▲ 영화 '아무도 모른다' 스틸컷

굶는 아이들이 정말 있다?

타인의 고통에 눈을 감아 버리는 사람은 친구를 둘 수가 없다. 물론 인간의 원초적인 자연상태가 동물의 왕국과 다를 바 없다고 보고, 또 인간을 이기적인 동물로만 생각하는 홉스와 같은 사람들은 이 말에 동의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최소한 자본주의 정신의 기틀을 마련한 아담 스미스는 홉스의 이기적인 본능만을 가진 인간상을 거부하고, 공감(Sympathy)이론에서 인간의 도덕적인 감정을 주장한다. 심지어 근대 정치사상에서 보수주의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에드먼드 버크조차도 스미스보다 더욱 극단적인 ‘고통에 대한 공감’을 언급한다. 아담 스미스가 타인의 고통에 대해서 ‘그 사람의 입장이 됨’으로써 고통을 추체험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반면, 버크는 ‘자연적인 방식으로 직접적으로’ 느끼게 된다고 보았다. 두 입장은 사유를 통해서건 직접적인 감정을 통해서건 인간이 타인의 고통에 대한 감정을 가질 수 있고 또 당연히 모든 사람들에게 그러한 감정이 있다고 말한다. 진정한 보수주의를 지향하는 한나라당 의원들은 최소한 정통 보수주의자들에게서 기본부터 배워야 한다.

그런데 굶는 아이들이 정말 있기나 한 거야? 좌파들이 유언비어를 조작한 거 아냐? 하하하. 서울역 XX백화점에 옷 사러 갈 때 눈에 보이던 게 없든? 혹시 그 많은 노숙자들을 좌파들이 돈 주고 풀어 놓은 사회양극화 퍼포먼스 중인 행위예술가들로 착각하는 게 아닌가? 더욱 심각한 것은 사회적인 양극화 현상이 개선되리라 기대되기보다는 오히려 점점 심화될 수밖에 없는 구조적인 문제를 안고 있다는 것이다. 청년세대들은 안정적인 일자리를 구하기가 점점 더 힘이 든다. 또 글로벌 스탠다드(이 글로벌 스탠다드는 한국 사회 도처에서 확산되고 있는 무서운 유령이자 질병이다)를 갖추려 ‘유연한 노동시장’ 조성이라는 미명하에 고용 불안정성이 더욱 악화되고 있다. 비정규직의 고용불안은 노동자 개인의 삶뿐만 아니라 일상적인 가족의 삶의 근본적인 불안과 불안정성의 원인이다. 그렇다고 병원에서 정신치료라도 받아야 하나? 아니면 교회를 다녀야 하나?

고용불안은 철학적인 의미에서의 모든 사람이 처할 수밖에 없는 실존적인 불안과는 다르다. 하이데거가 말한 인간의 실존적인 근본 정서로서 불안과는 달리, 고용 불안은 사회 구조적인 요인에서 초래되는 사회적인 병리현상이다.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실존적인 상황의 불안은 경제적인 불평등과는 직접적으로 관련되지 않는다. 반면 아무리 일을 해도 충족되지 않는 상대적인 빈곤은 부의 불평등한 구조의 문제다. 우리나라 노동자는 OECD국가 중 가장 많이 일하고도 상대적인 빈곤감을 가장 크게 느낀다는 점은 여러 지표를 통해서 알려진 사실이다. 희망 없는 삶을 견뎌내야 한다는 불안은 자본주의가 삶에 강제하는 일상의 공포이고 강요된 질병이다.

최소한 전국의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에게 밥을 먹여준다면?

내 아이가 다른 아이들과 태권도뿐만 아니라 모든 시험에서 싸워서 이기는 이기적이고 고독한 전사가 되어 승자독식의 무한 경쟁 자본주의에서 꿋꿋하게 살아간다면 나도 내 아이도 행복할까? 우리나라의 교육 현실을 둘러싼 문제점이 한두 가지일까만, 최근 정두언 한나라당 의원의 외고 폐지 논란은 집권여당의 균열에서 생긴 한편의 씁쓸한 코미디다. 물론 외고가 폐지되면 중학생과 초등학생들의 학습 부담과 사교육 부담은 현격히 줄어들 것이다. 그러나 대다수 사람들이 정작 외고가 폐지되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하는 것은 여러 가지 정치적인 변수들이 기득권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방향으로 작용할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당리당략을 떠나서 모든 부모들과 아이들을 위해서, 초등학교 나아가 중고등학교에까지 무료급식 제도를 정착하는 것이 세금정책으로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교육제도다.

경쟁만이 난무하는 척박한 황무지를 당장 오아시스로 만들지는 못할지언정, 친구들과 똑같은 점심을 먹으면서 나누게 되는 평등한 밥상의 시간을 국가에서 보장해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가지 경험적인 현실에서 비추어볼 때 평등 교육은 불평등한 사회 현실만큼이나 요원한 이념적인 요청에 머무르고 있다. 그럼에도 당장 실현 가능하고 또 실현되어야만 할 정책이 무상급식이다. 수많은 이해 당사자들의 이해관계가 조정될 뿐, 무엇 하나 국민 모두에게 자긍심을 주는 정책이 없다. 우리나라의 아이들이 국가가 제공하는 밥상을 받는다면 이 정책은 그렇지 못한 나라에 대해 우리가 누릴 수 있는 도덕적인 우월감과 자긍심이 될 수 있다. 딴 나라의 아이들이 약육강식의 자연 상태에서 성장하는 것이 글로벌 스탠다드라 해도 찬성할 이유가 없다.

승리한 소수의 뒤에는 수많은 루저들이 있을 뿐이다. 도덕적으로 정당한 제도로서 국민은 ‘우리가 그 제도를 만들었다’는 위대함을 스스로 체험할 수 있어야 하고 역사 속에서 공유될 수 있어야 한다. 내 아이를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아이를 위해서 그리고 아이들이 누려야 할 행복한 식사시간을 위해서도 예산이 우선적으로 배정되어야 할 것이다. 굶는 아이들을 따로 정책적으로 지원하는 것은 주린 배를 밥으로 채워 줄 수는 있어도, 공평하게 대접받고 있다는 평등의 감정을 채워줄 수는 없다.

철학으로 세상 읽기

모든 생명의 역동성이 자본에 의해 상품화되고 물신화되며 영혼 없는 죽은 생명들이 되어가는 세상에서 ‘시대의 혼’이자 ‘시대 모순의 반역’일 수밖에 없는 철학적 실천을 꿈꾸는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창립 정신을 받아 우리는 이 시대에 철학적으로 개입하고자 한다.

오늘날의 시대는 철학적 사유와 성찰, 탐색을 필요로 한다. ‘철학으로 세상 읽기’는 생명의 역동적 힘을 지배의 힘으로 바꾸어 놓으며 지배와 억압, 착취와 굴종을 낳는 이 세상을 철학적으로 사유함으로써 생명의 본래적인 힘과 주체적이고 비판적인 사유의 잠재력을 일깨우고 협력적 지성의 밑알이 되고자 하는 의도에서 기획된 철학적인 시대 평론이다.

김원열(한양사이버대) 문성원(부산대) 박준영(한철연 회원) 박지용(동덕여대) 이병수(경남대) 이순웅(숭실대) 이정은(연세대) 전호근(민족의학연구소) 구태환(상지대) 우기동(경희대) 김광호(한철연 회원) 조경란(성공회대) 송석현(방송대) 박종성(건국대) 박영균(서울시립대) 등이 연재한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홈페이지 http://www.hanphil.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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