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법 권한쟁의심판 청구 및 효력정지가처분 신청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판결에서 주목되는 건 대한민국 헌법을 시장주의적으로 해석하는 본격적인 시도가 이뤄졌다는 점이다.

대한민국 헌법은 자유민주주의 질서를 옹호하되 국민의 기본권을 엄격히 하고 있으며, 국민경제의 안정과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 남용 방지를 분명히 하고 있다(119조 2항). 헌재의 이번 판결은 미디어에 있어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 남용을 정당화하는 것으로 87년 헌법의 기본정신을 훼손한다.

효력정지가처분에 대해 신문법은 6:3으로, 방송법은 7:2로 기각했다. 헌재는 “절차상의 문제는 있지만 국회의 자율권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법률 자체의 위헌 여부를 판단하지 않겠다” “법률안 심의 절차를 어긴 점은 인정되지만 입법절차를 무효로 할 정도의 하자에 해당하지는 않는다”고 판결했다. 헌재가 절차의 위법을 분명히 했지만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을 기각해 버림으로써, 일단은 신문법, 방송법의 시행령 등 후속 조치를 제어할 수 없게 되었다. 이건 무얼 뜻하는가.

▲ 윤석민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한나라당의 미디어법은 신문의 방송 겸영과 자본의 미디어 소유를 요점으로 한다. 이같은 미디어의 산업화, 시장화는 필시 자본의 시장 지배력을 강화하고 경제력의 남용을 부추긴다. 더군다나 시장 지배력을 갖는 미디어자본에 대한 이렇다할 규제 장치도 없는지라 궁극적으로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을 흔들어놓을 공산이 크다. 헌재가 절차에 관한 위법 판결에 머무르지 않고 효력에 관한 기각 판결을 함으로써 스스로 헌법의 기본정신을 위배한 것이다. 말하자면 87년 헌법의 산물인 헌재 스스로가 87년 헌법의 근간을 훼손해버린 사건이다.

윤석민 서울대 교수는 조선일보에 실은 시론 ‘헌재 판결도 무시하며 민주주의를?’에서 87년 헌법의 근간을 훼손한 이번 판결을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소감을 피력했다. 윤석민 교수는 “판결문을 가득 채운 생소하고 난해한 법률 용어에도 불구, 헌재 판결의 메시지는 애초 무심히 지켜보던 필자의 마음에 살아있는 의미로 흘러들었다”고 썼다. 윤석민 교수는 “법정의 지혜가 무엇인지를 깨우쳐준 뜻밖의 선물 같은 사건” “국회의 현실을 질타하며 개선을 주문하는 준엄한 꾸짖음”으로 이번 헌재 판결을 풀이했다.

‘뜻밖의 선물’ ‘법정의 지혜’의 실체는 공적인 영역에서 이윤 추구의 대상으로 변모하는 대한민국 미디어의 현재와 미래다. 헌재가 87년 헌법 정신에 충실했다면, 국민의 기본권이나 119조 2항을 조금이라도 고려했다면 효력정치 가처분에 기각 판결을 내리지는 않았을 텐데 누군가의 기대를 충족하는 결정을 하고 말았다. 헌재가 뜻밖에 자본이 미디어를 평정해 이윤을 추구해도 좋다는 선물을 주니, 법정을 지혜롭다고 치켜세우는 데 조금도 인색할 이유가 없었던 모양이다.

윤석민 교수에게 “무수한 절차 위반, 원칙의 위반을 꼼꼼히 지적”하는 일 따위는 중요한 게 아닌 듯 하고, “패러디 장난질이나 치는 이들에겐 정녕 희망이 없”어 보이나 보다. 그런데 패러디 장난질을 가볍게 보는 건 조심할 일이다. 패러디는 단지 헌재를 조롱하는 철딱서니 없는 장난질이 아니라, 87년 헌법정신의 파탄, 즉 지금까지 상식에 부쳐온 사회 통념과 질서의 붕괴에 대한 강한 냉소와 저항을 함축하고 있다. 패러디는 87년 민주화가 낳은 88년 헌재의 유통기한이 만료됐음을 알리는 ‘참으로 질기고 질긴 사람들’의 집단적인 시그널이라는 점을 놓치면 곤란할 지다.

정상윤 경남대 교수는 한겨레에 실은 시론 ‘미디어법보다 더 중요한 것은’에서 사회적 소수자를 위한 프로그램의 약화와 저널리즘 기능의 약화를 걱정했다. 새 방송정책의 시행으로 언론은 무한경쟁 시장의 환경에 놓이게 되고, 특정 계층이나 권력에 편파적인 프로그램이 제작됨으로써 언론 스스로 언론임을 포기하는 상황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지당한 지적이지만 유감스럽게도 한가하다. 헌재의 판결이 불러올 ‘국민의 정신적 환경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 것들’에 대한 안좋은 우려는 이미 빠른 속도로 내치닫는 현재진행형이다. 87년 헌법의 근간을 뛰어넘은 이 유무형의 힘은 국회에서의 재논의, 다시 사회적 합의 노력 따위의 주장을 가볍게 조소할 것이다.

윤석민 교수가 뜻밖의 선물을 받아들고 패러디를 폄훼하며 87년 헌법을 훌쩍 뛰어넘는 시점에, 정상윤 교수는 “저널리즘의 첫째 의무는 진실이며, 충성을 바쳐야 할 대상은 바로 국민”이라며 87년 헌법의 기본권을 바탕으로 희망사항을 펼쳐놓았다. 두 시론은 헌재 판결 시점, 언론악법을 둘러싼 싸움의 현주소를 웅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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