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랑 이는 가을바람에도 나뭇잎들이 우수수 떨어집니다. 산길을 오르내리며 수북이 쌓인 나뭇잎을 밟는 느낌이 평온합니다. 어느새 감나무에도 감잎이 모두 떨어져 노란 감들만 감나무에 풍성하게 매달려 있습니다. 온 동네가 노란 감들로 둘러싸여 산골마을이 평화롭습니다.

이제 감을 딸 때가 되었습니다. 다른 해 같으면 열심히 따서 깎고 있을 텐데 올 해는 좀처럼 감 따기가 쉽지 않습니다. 찬바람이 불어오면서 바람구멍이 더욱 커 보여 집 공사를 멈출 수가 없습니다. 웬 만큼하고 ‘곶감’할 생각이었는데 바람구멍이 좀처럼 메워지지 않습니다.

이러다 가을비를 만났습니다. 밤새 센바람과 함께 내린 가을비는 마음을 조급하게 합니다. 철이 오고 감을 담담히 맞이하면 될 일인데 조급한 마음이 생기는 건 아직 겨울을 맞이할 마음준비가 되지 않아서입니다.

▲ ⓒ지리산

▲ ⓒ지리산

감 따는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비 그친 뒤 전국이 영하로 떨어진다니 하루아침에 나무에 매달린 감들이 모조리 얼어버리지 않을까 걱정이고 아직도 찬바람이 숭숭 들어오는 집은 어찌 겨울맞이를 해야 하나 걱정입니다.

바깥살림도 그렇지만 안살림도 겨울맞이로 바쁩니다. 정들었던 이불을 빨아서 말리고 겨울이불로 바꾸어야 하고 겨울옷도 꺼내고...

계절은 저절로 오지만 계절을 맞이하는 우리는 손놀림과 발걸음을 바쁘게 해야 하나 봅니다. 날이 추워지면 옷이 두꺼워져 빨래가 어려워집니다. 이불도 척척 해결하는 세탁기가 정말로 고맙습니다.

세탁기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세탁도 잘 안되고 탈수를 해도 옷에 물기가 가득합니다. 세탁기가 덜어주는 일이 엄청난데 고장이라니 잔잔한 물에 바윗덩어리가 떨어졌습니다.

버려야 할 지 한참을 고민하고 있다가 옆집에 냉장고 고치러 온 분한테 물었더니 벨트만 바꾸면 된다고 합니다. 기계라면 남의 일처럼 생각하고 살았는데 자기 손으로 많은 것을 해결해야 하는 환경에서 살다보니 세탁기 벨트는 간단한 일이었습니다.

다음날 벨트 사다 갈아 끼웠더니 세탁기가 쌩쌩하게 돌아갑니다. 항상 잘 돌아가려니 생각하고 관심가지지 않던 세탁기에 미안하기도 하고 잘 돌아가는 세탁기가 고맙기도 합니다.

사람살이도 항상 곁에 있는 사람에게 무관심하게 됩니다. 잘 하려니 믿어서 그런다고 할 수도 있지만 주변을 잘 돌보는 마음이 필요함을 세탁기에서 배웁니다.

며칠 뒤, 세탁기에 다른 문제가 생겼습니다. 단추만 누르면 자동으로 빨래가 되었는데 물이 차도 물이 그치지 않고 자동으로 넘어가지 않습니다. 이 문제는 해결할 수 없어 서비스센터에 전화를 했습니다.
알려달라는 모델번호를 알려주었더니 14년 된 모델이라 부품이 없어 고칠 수 없다고 합니다. 센서 판에 물이 들어가면 고장 난다고 투명테이프로 야무지게 붙이고 썼는데 아무래도 센서 판이 고장 난 것 같습니다.

자동으로 넘어가지 않아 빨래 한번 하려면 물을 잠갔다 틀었다, 탈수 버튼을 누르고 왔다, 갔다 하느라 번거롭지만 그래도 쌩쌩 돌아가는 세탁기가 찬바람 나는 계절에 더욱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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