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이 무엇인가를 생각한다. 사실 지난주에 결혼식 참가를 위해 대구에 내려가다가 문득 써보고 싶은 소설이 생겼다. 순간적으로 생각해낸 공간들이 좋았고,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은 가을 산빛과 내 추억이 담긴 장소들이 어우러졌기 때문에 잘 묶으면 괜찮은 단편소설이 하나 될 것 같아서다. 하지만 열심히 자판을 두드리다가 금방 싱거워졌다. 결국 글을 쓰면서 느끼는 내 문장은 마치 서평을 쓰는 문체 마냥 딱딱하고 단조로웠기 때문이다. 때문에 과연 이렇게 쓴 것이 제대로 소설로 그려질까를 고민하다가 멈췄다. 물론 조만간에 다시 글쓰기를 재개해서 어느 문학잡지의 공모에 낼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소설쓰기가 순간의 감상만으로 완성되는 것만은 아니다.

사실 내가 좋아하는 소설은 비교적 단순하다. 젊은 시절에는 새로운 장르나 작가 읽기에 도전한 적이 있지만 그 후부터는 나에게 익숙한 작가들의 작품에게만 손이 간다. 그런 마지노선이 내 나이대인 김영하나 김연수 정도 이상의 작가군에 머물러 있다. 내 나이 아래 세대의 작가 중에서 호감을 가져본 작가는 극히 드물다.

▲ 도서‘게으름을 죽여라’표지
그런데 우연히 구경미의 소설집 ‘게으름을 죽여라’가 눈에 들어왔다. 사실 99년에 신춘문예로 등단했다고 하지만 그의 실제 나이를 모른다. 그냥 사진 등으로 추론해 보건데 70년대 후반 태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런 점에서 그는 내가 선호하는 세대보다 한참 뒤 세대다.

어떻든 그의 첫 소설 ‘뮤즈가 좋아’를 읽었다. 그리고 역시 그러면 그렇지 하는 후회를 했다. 가수로서 성공을 꿈꾸는 한 청년의 내면을 내레이션 하는 이 소설은 첫 머리에 넣기에 많이 유치했다. 사실 주인공도 그렇고, 내부의 갈등도 그렇고, 젊은이의 푸념 같은 소설이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화자도 자기 독백식이라 더욱 독자와 거리는 멀어졌다. 사실 음반 구성이 그렇듯 첫 번째에 좋은 단편을 넣고 이후 후반부는 호감도가 떨어지는 작품을 넣는 게 단편집의 일반적인 구성이다. 그냥 접을 까 하다가 두 번째 소설에 눈이 간 것은 ‘독평사’라는 제목 때문이다. 내 스스로가 남들의 책을 읽고 평을 하는 못된 습성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런 일이 직업으로 있을 수 있다는 호기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떻든 ‘독평사’는 인물설정이나 이야기 구성이 재밌었다. 외로울 수밖에 없는 이 시대에 자신의 글을 읽어주는 이를 찾길 원하는 저자들에게 장지영이라는 소설 속의 인물은 특별하게 다가올 것 같다. 어떻든 작가는 소설 속 화자를 통해 글을 쓰는 이들은 글을 쓰는 사실과 고통이 있으니 외양만 지적하지 말고 고통의 내면까지 봐달라고 말한다. 사실 이 소설 역시 그다지 좋은 구성의 소설이라고 할 수 없다. 하지만 이 소설의 장점은 독평사라는 독특한 인물 설정이다. 대학시절에 ‘폴 오스터’의 소설을 좋아했다는 ‘독평사’는 이 세상에 쉽게 볼 수 없는 독특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 기괴한 세상을 풀어낼 때는 특별한 화자들이 필요하다. ‘일주일’의 주인공은 아주 평범한 주인공인데, 자신의 처한 환경과 분노로 세상을 읽어낸다.

표제가 된 ‘게으름을 죽여라’도 마찬가지다. 스물여섯임에도 할 일이 없어 방황하는 ‘나’를 엄마와 할머니가 주도해서 ‘게으름 치료센터’에 집어넣는다. 이곳은 사회에서 무기력해진 이들을 훈련시키는 곳이다. 그곳에서 ‘나’는 미조와 동화를 만나 어떻든 세상 모든 게으름에는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렇듯 이 소설의 주인공들은 이 시대의 변방에 있는 ‘놈팡이’들이다. 평가받지 못하는 악단의 보컬, 취업하지 못한 20대 후반의 여성 등 어떤 직장에 정주하지 못하고 헤매는 이들이다. 이런 주인공들은 작가가 아마 은평구의 한 자취방에 살면서 동네 작가들과 어울리다가 이곳저곳에 소설을 발표하는 비루한 처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싶다. 물론 여기서 비루한 것은 사회적 처지이지, 모든 면에서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사실 이런 작품 속 주인공들은 소위 88세대로 통칭하는 이 시대 젊은이들과 거의 닮아있다. 사실 이 시대 젊은이들 가운데 ‘대기업’에 취업하거나 ‘전문직’을 얻은 소수를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88세대에 속해있다. ‘워킹푸어’에 속한 이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그런 점에서 ‘구경미’는 이들 세대의 대변자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작가는 소설의 내공이나 깊이라는 측면에서는 아직 많이 부족하다. 아마도 그걸 보충해줄 수 있는 것은 더 깊은 독서와 글쓰기 연습이라고 생각된다. 여행도 좋겠지만 작가의 상황 상 그건 좀 무리한 생각이라도 들기에 그녀가 더 큰 작가로 서기 위해서는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께스부터 보르헤스 등의 작품을 더 깊게 연구하면 어떨까 싶다. 이 비루한 현실을 넘어설 수 있는 것은 상상밖에 없기에 작가 역시 너무 현실에 매몰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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