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법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판결이 내려졌다. 논란은 있지만, 개인적으로 헌재의 판결은 헌법재판소다운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번 헌재의 결정을 권력의 눈치를 본 타협의 산물이라고 정치적인 차원에서 비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판결문에 밝혀놓은 ‘의의’를 읽어보면, 반드시 헌재가 정부의 눈치를 보고 이런 판단을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헌재는 이번 결정을 두고 “하자 있는 심의 표결절차에 터잡아 이루어진 법률안 가결선포행위가 국회의원인 청구인들의 법률안 심의표결권을 침해하였다는 점을 확인”했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표결처리에서 절차상 하자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니 한나라당이라고 해서 환호작약할 일이 아니다.

문제는 헌재의 판결에 있는 것이 아니라, 헌재가 설정하는 ‘어떤 민주주의’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헌재의 결정은 입법기관인 국회의 법률 선포를 사법부가 나서서 무효화하는 것에 대한 부담을 솔직히 드러낸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헌재는 ‘절차적 민주주의’를 민주주의 일반과 동일시하는 시각을 무의식적으로 채택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미디어법 날치기 통과를 둘러싼 논란을 헌재가 잠재워줄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다소 과도한 소망충족의 꿈이었다. 헌재의 판결은 절차상 하자는 있지만, 그게 국회의 입법권에 사법부가 간섭할 만큼 결정적인 것이 아니라는 판단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절차적 민주주의가 다소 침해되었지만, 그렇다고 국회의 자율성을 심대하게 훼손시킬 만큼은 아니었다는 의미이다.

▲ 9월29일 오전 10시 서울 종로구 가회로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서 민주당을 비롯한 야 4당이 청구한 ‘미디어법 등 관련 권한쟁의 사건’에 대한 2차 공개변론이 열리고 있다. ⓒ헌법재판소

헌재의 어떤 민주주의?

나는 이런 헌재의 문제의식에 대해 동의할 수는 없지만, 납득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이런 헌재의 결정은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제도에 내재한 한계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라서 흥미롭기까지 하다. 마치 바이마르 공화국의 민주주의가 파시즘의 등장을 ‘절차적’으로 막지 못했던 것처럼, 이번 헌재의 결정도 정작 절차를 문제 삼았지만 그 절차를 통해 발생한 결과물에 대해 무기력한 태도를 보여줌으로써, 민주주의는 옹호했지만 사회적 정의는 방기하는 이중성을 노정시켰다. 미디어법이나 금융지주법이 근본적으로 반민주적인 법안이 아니라고 헌재는 판단했지만, 정작 문제는 이 법안의 시행으로 인해 발생할 정의롭지 않은 사회적 효과들에 대해 헌재는 모른 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헌재는 너무도 자신의 본분에 충실한 나머지 이번 미디어법으로 인해 한국의 신문방송시장이 어떤 위기에 처하게 될 것이며, 궁극적으로 헌재가 수호하고자하는 민주주의적 절차를 지탱하는 사회적 정의의 문제가 어떻게 냉소의 대상으로 전락할 것인지를 헤아리지 못했다. 실제로 한나라당이 무리수를 두면서 미디어법을 비롯한 쟁점 법안들을 통과시킨 것은 다분히 정치적 의도를 가진 것이고, 특정 세력의 이해관계를 다수에게 강요하는 부도덕한 결과를 초래할 공산이 크다. 사정이 이런데도 자유민주주의 헌법정신의 수호자를 자임하는 헌재가 아무런 대책을 내놓을 수 없다는 것은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 헌재의 보수성을 지적하고 타협주의를 비판한다고 결판이 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민주주의 한계와 무관치 않아

반복해서 지적하자면, 결국 이 모든 것은 한국 민주주의의 한계와 무관한 것이 아니고, 이명박 정부 이후 결정적으로 후퇴한 사회 정의의 실상을 직접적으로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안타깝지만 이번 결정으로 인해 헌재는 이권의 아귀다툼이 횡행하는 현실에 개입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포기한 셈이다. 물론 이것은 민주주의적 제도로서 헌재에 내재하고 있는 한계 때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미디어법 처리문제를 ‘절차’의 문제에 한정해서 대립전선을 형성하려고 했던 민주당과 진보정당들의 한계 때문이기도 하다. 결국 헌재에게 문제를 떠넘김으로써, 미디어법의 위법성을 직접적으로 알리기보다, 헌재의 판결이 나오기를 기다려야하는 침묵의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여기에서 이들에게 하나의 딜레마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헌재의 결정을 따르자니, 미디어법의 적법성을 인정하는 꼴이고, 그렇게 하지 않자니, 헌재에서 강조하는 민주주의적 절차를 무시하는 꼴인 것이다. 결국 이래 저래 나쁜 짓만 골라서 한 한나라당이 이득을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정말 우리는 왜 이렇게 무기력한가? 이 무기력증을 해소하고, 헌재의 결정을 뒤집을 수 있는 방법은 미디어법에 대한 국민투표밖에 없는 것 같다. 헌재가 못한다면, 헌법의 주인이 나서서 직접 일을 처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국 사회의 문제점은 절차적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가 급진화하지 않아서 발생한다는 것을 이번 판결은 다시 한 번 확인시켜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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