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한반도 사드 배치에 대한 경제 보복이 가시화되면서 동아시아 외교를 둘러싼 ‘태풍’의 흐름이 거세지고 있다. 미국 국무부는 현지시간 2일 연합뉴스의 관련 논평 요청에 “우리는 한미동맹의 사드 배치 결정에 대해 중국이 한국의 민간분야 기업에까지 조치를 취했다는 보도에 우려하고 있으며, (그 상황을) 면밀히 주시하고 있다”며 “사드는 명백하고 무모하며 불법적인 북한의 군사적 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신중하고 제한된 자위 방어적 조치”, “이를 비판하거나 자위적 방위조치를 포기하라고 한국에 압력을 가하는 것은 비이성적이고 부적절하다”고 비판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국무부가 이런 입장을 공개적으로 밝힘으로써 잠시 휴전 분위기였던 미국과 중국 간의 관계는 다시 냉랭한 상황으로 돌아섰다. 중거리탄도미사일 발사 시험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내놨던 중국은 북한을 다시 챙겨야 하는 입장이 됐다. 미국과의 갈등이 불거지는 상황에서는 일단 주변국들과의 관계를 다잡아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최근 리길성 북한 외무성 부상은 방중해 왕이 외교부장을 만난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은 리길성 부상이 입국할 당시 직접 관용차를 보내기도 했는데, 이는 중국 정부가 초청했다는 것을 드러내는 신호로 해석됐다. 지난 1일 중국 외교부가 밝힌 바에 따르면 왕이 외교부장은 리길성 부상에게 “중국과 북한은 산수(山水)가 이어져 있다. 중·조 우호 전통을 공고하게 발전시키는 것이 중국의 일관된 입장”이라고 발언했다고 한다.

중국 정부 초청으로 방중한 북한 리길성 외무성 부상(왼쪽)이 지난 1일 왕이 중국 외교부장과 만나 악수를 나누고 있다. (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하나의 중국 원칙을 존중한다”는 발언을 내놓고 미일정상회담을 진행한 것까지 겹쳐 보면 결국 동아시아 정세가 미-일 대 북-중의 구도로 짜여지고 있음이 점점 더 분명해진다. 북한이 중국에 리길성 부상을 보내는 동시에 말레이시아에 대표단을 보내 외교적 압박을 병행한 것은 이런 움직임을 뒷받침하는 하나의 정황 증거다.

외신에 따르면 말레이시아 정부는 김정남 암살의 배후에 북한이 있다는 사실을 밝혀줄 유력한 용의자인 리정철을 추방하기로 결정했다. 결국 김정남 살해는 배후가 밝혀지지 않은 채로 ‘조연’에 불과했던 베트남과 인도네시아 출신 두 여성이 기소되는 선에서 마무리될 확률이 높아지고 있다. 마지막 가능성은 유족들이 나서 김정남의 신원을 확인해주는 것뿐인데, 이는 이들을 보호하고 있는 중국의 양해가 있어야 가능하다.

그런데 위의 정황을 상기하면 중국이 이를 허용할 가능성은 낮아지고 있다. 북한은 김정남을 단지 “쿠알라룸푸르 공항에서 사망한 공민”으로만 표현하고 있다. 북한 입장에서 사망한 사람은 김정남이 아니라 김철이다. 여권에 이름이 그렇게 기재돼있기 때문이다. 역으로 말하자면 죽은 사람이 김정남이라는 사실이 확인되는 것만으로도 북한은 부담을 지게 되는 것이다. 화학무기 사용 등을 이유로 북한에 제재가 가해지기 시작하면 곤란해지는 것은 중국이다. 제재의 키는 중국이 쥐고 있기 때문에 ‘중국책임론’이 다시 불거질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국 입장에서도 시신의 신원 확인이 정확히 되지 않는 게 상책이다.

말레이시아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설 것 같지도 않다. 말레이시아 정부는 6일부터 북한과의 무비자협정을 사실상 파기한다는 취지의 발표를 했지만 앞서 리정철 추방과 엮어 보면 결국 북한과 이 문제를 처리하기 위한 어떤 선에 대해 모종의 합의를 이뤘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북한과는 애초 단교 조치까지 전망됐지만 말레이시아에 파견된 북한 대표단이 갈등 수위를 조정하면서 명분과 이해를 주고받는 협의를 진행하였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북한 대표단이 말레이사아 정부에 요구한 것은 리정철 송환과 김정남 시신 인도였는데 전자가 어떤 식으로든 성사된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구도가 해소되지 않는다면 중국의 한반도 사드 배치에 대한 경제적 보복 조치는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 보니 2일 주요 언론 지면에도 이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다수 실렸다. 그러나 결국 이 상황이 박근혜 정권의 외교 및 대북정책 실패로부터 비롯된 것이라는 지적은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역시 중국은 믿을 수가 없다”는 수준의 반응이 나오는 것은 언론의 비극이다.

조선일보 3일자 사설

대표적인 것은 조선일보다. 조선일보는 2일 사설에서 “현 지구 상에서 중국은 정치적 목적으로 노골적 경제 보복을 하는 거의 유일한 나라”라면서 “중국의 보복으로 한국 경제가 입을 피해는 상당할 것이다. 그러나 결코 견디지 못할 수준은 아니다”라고 썼다. 조선일보는 “중국 의존도를 지금부터 차근차근 줄여나가야 한다”라면서 “우리는 2000년 중국산 마늘 분쟁 때 그렇게 당하고도 중국 위주 전략을 수정하지 못했다”고도 주장했다. 또, 조선일보는 “중국 시장은 여전히 중요하지만 더 이상 매력 덩어리는 아니다. 인건비가 급등한 ‘레드 오션’으로 바뀌었다”면서 “이미 화장품 업계는 중국 대신 중동과 동남아 시장 쪽으로 눈길을 옮기기 시작했다”고도 했다.

외교 정책은 급변하는 세계 상황에 맞춰 최선의 태도를 정하는 문제이지 친교를 맺을 국가를 쇼핑하는 게 아니다. 한국은 중국과 경제적으로 밀접한 관계일 수밖에 없는 지정학적 이해를 갖고 있다. 중국이 아무리 비이성적인 태도로 대응한다 하더라도 중국 체제를 무너뜨릴 마음을 먹지 않는 이상 황당한 경제 보복을 감당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이 리스크를 어떻게든 축소하는 게 외교안보정책의 존재 이유이다. 그런데 과연 사드 한반도 배치를 성급하게 기정사실화 한 이후 우리가 얻은 외교안보적 이득이 무엇인가. 사드 배치의 정당성 여부를 떠나서 이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맥락과 시점에 대해 무슨 외교안보 정책적 고려가 있었는지 우리는 확인한 바 없다.

외교안보정책에서 우리가 가진 거의 유일한 지렛대는 대북관계이다. 대북관계를 무조건 개선해야 한다거나 또는 제재 일변도의 태도만을 유지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그래서 불성실하다. 그런데 박근혜 정부의 대북정책은 정확히 뭐라고 말하기도 어려운, 일관성 없는 예측불허의 연속이었다. 이것에 대해 평가하지 못하고 “중국 의존도를 줄이자”는 ‘원론’을 얘기하는 것은 “할 말이 없다”는 것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수출시장의 다변화는 필요하다. 그런데 각국의 시장에는 다 각자의 사정이 있기 마련이다. 그것에 대응하는 것은 외교통상정책의 몫이다. 예를 들면 미국 무역대표부는 의회에 ‘한미FTA 재검토’를 시사 한다고 해석할 수 있는 보고서를 제출했다. 한미FTA를 체결할 때는 당연히 미국의 이런 변덕(?)을 예상하지 못했다. 한국 정부는 “무역 협정의 효과를 분석한 것에 불과하지 한미FTA 재검토를 직접 언급한 것은 아니다”라는 안이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그러면 이제 “미국 의존도를 줄이자”고 해야겠는가? 박근혜 정권의 파탄적 외교안보정책에 대해 명확히 평가하지 않으면 한 발도 나아갈 수 없다는 사실만이 확인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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