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되살려 보자. 20대 국회를 탄생시킨 2016년 4월 총선은 거꾸로 퇴보한 선거제도 속에서 치러졌다. 총선을 코앞에 두고 국회는 허겁지겁 선거제도 개편에 착수할 수밖에 없었다. 지역구별 인구 편차가 심해 대의 비례성이 훼손되는 위헌 요인을 시정하라는 헌법재판소의 결정, 이에 따른 2015년 2월 지역구와 비례대표 비율을 2대1로 하고 권역별 비례대표제 도입을 권고하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제안이 있었던 것이다.

결과는 퇴행이었다. 의원 수는 300명으로 19대 국회와 동일했지만, 계급계층별 대의성을 높이기 위한 비례대표 의석이 54석에서 47석으로 오히려 줄어버린 것이다. 이유는 한 가지다. 소선거구제 지역구 조정을 둘러싸고 과반까지 욕심내던 당시 새누리당과 야당들의 이해관계가 충돌했기 때문이다. 권역별 비례대표제 도입 등은 꿈도 꿀 수도 없었고, 비례대표 의석만이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의석수를 늘리면서 권역별 비례대표를 도입해 지역구와 비례대표 비율을 2대1로 조정할 수도 있었다. 그렇게 안 된 이유는 간단하다. 국회의원 세비를 깎기 싫어서다. 세비를 동결하지 않는 한, 의석수를 늘리면 예산이 덩달아 늘어나게 된다. 가뜩이나 국회에 대한 불신이 심각한 상황에서 국민들이 이를 좋아할 리 만무하다. 그러니 의석수는 동결한 거라고 봐도 실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연합뉴스 자료 사진

여소야대’로 귀결된 선거결과로 인해 퇴행적 선거제도는 망각 속에 묻힐 뻔했다. 하지만 희대의 국정농단 사태를 계기로 하며, 정권교체와 함께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를 바로잡고 다당제 민주주의가 작동할 수 있도록 개헌을 통해 권력구조를 바꿔야 한다는 의제가 전면에 떠올랐다. 국회가 ‘소 닭 보듯’ 하며 몇 년 간 구석에 처박아뒀을 선거제도가 자연스럽게 정치개혁의 핵심 의제로 떠오른 건 물론이다. 하지만 여전히 국회의 반응은 미온적이다.

‘선거제도를 개편하지 않는 한 개헌도 소용없다’며 동분서주하고 있는 하승수 비례민주주의연대 공동대표의 말은 정확하다. 민주당을 제외한 정당들이 ‘제왕적 대통령제’를 손질하겠다며 저마다 내거는 권력구조 개편안은 사실상 내각제와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국회와 행정부를 모두 장악하는 ‘제왕적 총리’가 탄생할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는 제도다. 바람직한 ‘분권형 대통령제’와는 거리가 한참 멀다. 분권형 대통령제도 ‘대통령제’인 한, 총리 추천권을 국회에 주고 대통령과 총리의 업무를 최대한 나눠 맡는다고 하더라도 칼로 무 자르듯이 나누기란 불가능하다. 분권형 대통령제 아래에서도 대통령과 총리의 긴밀한 협치는 필요조건이라는 얘기다. 대통령과 협치하는 총리의 정당성은 국회의 정당성에서 나올 수밖에 없고, 국회의 정당성은 결국 대의의 충실성을 꾀할 수 있는 선거제도의 개혁을 통해 높아질 수밖에 없다.

조기대선 이전에 대의의 충실성을 꾀할 수 있는 선거제도의 개혁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정치인의 속성상 선거제도 개편은 시간이 흐를수록 뒷전으로 미뤄두게 된다. 1년이 채 흐르지 않은 지금 시점이야말로 선거제도를 개혁할 수 있는 절호의 시간이다. 지금은 최선의 선거제도를 위한 논의의 시간을 갖는 것보다 한걸음을 내딛는 차선의 선거제도를 구축하는 게 시급하다. 세 가지만 합의하면 대선 전 선거제도 개혁은 충분히 이룰 수 있다.

첫째, 소선거구제 253석은 그대로 두는 것이다. 246석을 253석으로 늘린 지 1년밖에 안 된데다 워낙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엇갈리는 사안이니만큼 손대지 않고 두는 것이다. 둘째, 2015년 2월 선관위가 제안한 대로 지역구 대 비례대표 비율이 2대1이 되도록 권역별 비례대표제를 도입해 비례대표 의석을 47석에서 127석으로 80석 늘리는 것이다. 셋째, 의석이 늘어난다고 국회 세비 예산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 동결하는 것이다. 세비 동결 속에서 비례대표 의석수를 확대하자는 얘기다.

이중 관건은 세비 동결이다. 2016년 한해 국회의원 1인 세비(보좌진 운영비 포함)는 27억 원 정도다. 300명으로 계산하면, 8100억 원 수준이다. 80석이 늘어나면, 국회의원 1인당 세비는 21% 감소한 21억3천 만 원으로 줄어든다. 충분히 감내할 수 있는 수준이다. 2017년 국회의원 평균 월급은 1110만원 수준이다. 21% 줄어들면 월 877만원 정도다. 최저임금의 6배가 조금 넘는 수준이다. 2017년 최저임금은 월 135만원 수준이다. 스페인에서 새 정치 실험을 통해 지지도를 넓혀가고 있는 신생정당 포데모스의 국회의원은 최저임금의 3배를 넘지 않는 수준에서 세비를 지급받는다고 한다. 이 정도까지는 아니라 해도 ‘세비 동결 속 비례대표 확대’는 국회에 대한 신뢰를 넓혀갈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안이다.

모든 정치권은 미온적이고 시큰둥하다. 개헌을 말하는 정당들도 관심은 온통 권력구조 개편뿐이다. 안철수 전 국민의당 공동대표 역시 ‘개혁의 골든타임’을 외쳐왔지만, 그 역시 개헌은 권력구조 개편이 전부인 것처럼 사고하는 건 마찬가지다. 대선과 동시에 국민투표를 통해 국민 기본권 강화를 이루는 단계적 개헌이나 선거제도 개혁을 하는 것에 대해선 아무런 언급도 없다. 문재인 민주당 전 대표는 내년 지방선거 때 개헌하겠다고 여러 차례 일정을 밝혔다고 했지만, 민주연구원의 개헌 관련 문건 파동 직후 고육책으로 내놓은 입 발린 말에 불과할 뿐이다. 핵심적인 대선 의제로 삼고 내년 지방선거 때 개헌하자는 일정을 밝힌 안철수를 모방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불행하게도 ‘개혁의 골든타임’이 얼마 남지 않은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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