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작가 엔도 슈사쿠의 저작 ‘침묵’이, 서양인 감독과 배우의 조합으로 조우한 작품이 ‘사일런스’다. 일본에서 배교했다는 소문이 파다한 스승 페레이자(리암 니슨 분)를 찾기 위해 일본으로 발걸음을 향하는 로드리게스 신부(앤드류 가필드분)의 여정을 그린 이 영화는, 고난에 대해 왜 신은 개입하지 않고 침묵(사일런스)하는가 하는 ‘신정론(神正論)’의 문제를 다룬다.

에도 막부 당시 일본의 지배 계급은 가톨릭을 용인하지 않았다. 가톨릭이 서양이라는 외세의 침입을 용이하게 만들어주는 교두보 역할을 한다는 점, 일본 불교에서 모시는 부처를 가톨릭이 다른 신으로 인정하지 않는 점 등으로 말미암아 일본 지배 계급은 가톨릭을 용인하지 않고 가톨릭을 믿는 일본인과 이를 포교하는 서양인 신부를 색출하고 처형한다.

영화 <사일런스> 스틸컷 이미지

그런데 당시 에도 막부가 가톨릭교도를 제거하는 방식은 조선시대 지배 계급의 가톨릭 탄압과는 다른 양태를 갖는다. 흥선대원군을 비롯한 조선 지배 계급은 가톨릭을 신봉하는 이를 귀에 화살을 꽂고 ‘처형’하는 데 집중한 반면, 일본 에도 막부의 지배층은 색출하여 처형하는 것에만 집중하지 않는다.

가톨릭의 지도자는 ‘신부’다. 신부는 일반 신도보다 신앙심이 돈독하고 신을 향한 경외심도 높다. 한데 신부가 성화를 밟는(필자 주-영화나 소설에서는 ‘후미에’로 묘사된다) 식으로 ‘배교’를 하면 가톨릭을 믿는 에도시대 당시의 일본 신자들에게 ‘탄압 앞에서는 신부도 별 수 없구나’하는 실망감을 심어준다. 종교 지도자도 별 볼 일 없다는 걸 입소문으로 퍼뜨리게 함으로 말미암아 가톨릭 신앙 공동체의 단결심이 와해되고 신앙은 자연스럽게 궤멸되는 걸 노리는 게, 영화 속에서 묘사되는 에도 막부 지배층의 ‘가톨릭 박멸 전략’이다.

영화 <사일런스> 스틸컷 이미지

신부가 배교를 택하는 동기는 신부의 육체에 가해지는 고문 때문이 아니다. 로마 시대에는 산 채로 사자밥이 되거나 원형경기장의 횃불이 되는 화형을 당하는 잔인한 탄압이 일본 에도 막부 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전개됐다. 그럼에도 기독교는 결국 로마의 국교로 자리잡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탄압받던 종교가 국교가 되는 아이러니 말이다.

가톨릭교도나 기독교인의 숨통을 끊어놓는 탄압만으로는 지배 계층이 가톨릭 또는 개신교를 제거할 수 없었다는 이야기다. 다시 일본 에도 막부 시대로 돌아와, 신부가 고문을 받다가 죽는 건 ‘순교’가 되기에 자기 목숨 하나 잃는 것쯤은 두려워하지 않는다. 신부가 신앙을 잃는 결정적인 동기는 가톨릭을 믿는 일본인 신도가 목숨을 잃기 때문이다.

신부는 자기 한 목숨을 잃는 건 전혀 아깝지 않다. 하지만 자신 때문에 다른 신도들이 연달아 죽어나가는 걸 신부가 견디지 못한다는 걸 에도 막부 지배층은 노린다. 이들의 이런 포석에 페레이라 신부가 믿음을 잃은 것이다.

영화 <사일런스> 스틸컷 이미지

다시 신정론으로 돌아와서, 에도 막부 지배층, 정확하게 표현하면 나가사키 지배층이 가톨릭교도를 탄압할 때 신은 왜 침묵하는가에 대해 살펴보자. 구약에서 묘사되는 신은 ‘응징의 신’이다. 우상 숭배도 아니고, 왕이 인구조사를 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스라엘 사람 몇 만 명이 목숨을 잃는 상황이 벌어지던 시대가 구약 시대다. 하지만 신약 시대에 들어서면 상황이 달라진다. 신약에는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갑자기 죽음을 맞는 것 같은 예외적인 상황을 제외하고는 신의 직접적인 개입이 두드러지지 않는다.

영화에서 신부들은 일본인 신도들이 에도 막부의 탄압 속에서 죽어갈 때 신은 어디에 있는가를 회의한다. 신은 언제까지 침묵할 것인가, 신이 있다면 신부와 일본인 신도들이 당하는 고통을 언제까지 보고만 있는 걸까 하는 신정론적인 물음말이다. 그럼에도 신의 침묵은 신의 부재나 신의 무능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도리어 신이 함께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방증이라는 것을 마틴 스콜세지 감독은 마지막 시퀀스를 통해 관객에게 제시한다.

늘 이성과 감성의 공존을 꿈꾸고자 혹은 디오니시즘을 바라며 우뇌의 쿠데타를 꿈꾸지만 항상 좌뇌에 진압당하는 아폴로니즘의 역설을 겪는 비평가. http://blog.daum.net/js7kei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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