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은 결국 헌법재판소 탄핵심판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간의 논란을 되짚어 보면 헌법재판관과 국회 측이 자신을 신문할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이유였다. 시시콜콜 묻는 질문에 대답하다 보면 자신이 이성적으로 흐트러진 모습을 보일 수 있고, ‘논리적 구멍’을 메우지 못해 더 불리한 지경에 빠질 수 있다는 판단을 한 것인지 모르겠다. 아니면 ‘국회-보수언론-JTBC-검찰 및 특검-헌법재판소’가 모두 대통령을 끌어내리기 위한 작당을 하고 있다는 식의 음모론을 진지하게 믿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상황은 녹록치 않다. 28일 주요 일간지들은 헌법재판소 탄핵심판 최후 변론에 박근혜 대통령이 출석하지 않은 것에 대해 비판적인 사설을 실었다. 그간 ‘태극기 집회’ 등의 여론을 신경 쓰며 눈치 보기로 태세를 바꾼 조선일보까지도 박근혜 대통령의 불출석에 대해 한 마디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박 대통령은 검찰과 특검 조사에도 응하지 않고 헌재에도 출석하지 않았다. 청와대 압수 수색도 막았다. 그러면서 국민이 가장 궁금해 하고 탄핵심판의 핵심 쟁점이 돼 있는 부분에 대해 아무런 해명을 않고 있다”고 쓴 것이다.

언론이 전하는 박근혜 대통령의 입장은 올해 초 청와대 상춘재에서 진행된 기자간담회와 이후 정규재TV와의 인터뷰에서 주장한 내용과 동일하다. 두 재단은 ‘선의’로 설립됐고 대기업들은 국가 정책에 협력하기 위해 출연한 것이며 최순실 씨는 연설문의 일부 표현을 손 봐줬을 뿐이고 세월호 참사 당시 미용 시술이나 의료 처치설 등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조선일보는 이 해명의 부실함 역시 지적하고 있다. “핵심 문제는 대통령이 왜 최순실이라는 무자격자가 막대한 자금의 재단을 장악하도록 했느냐는 것이다. 박 대통령은 자신의 생각을 국민 앞에 소상히 털어놓을 마지막 기회였던 이번 최종 변론에서도 이 부분에 대해 해명하지 않았다”고 썼다.

박근혜 대통령 대리인단의 김평우 변호사 등은 이날도 주요 보수 일간지에 자신의 의견 광고를 실었다. 이들의 문제제기는 국회의 탄핵소추안 표결과 헌법재판소 탄핵심판에 대한 절차적 문제에 집중돼 있다. 박근혜 대통령에게 제기된 혐의 자체에 대해선 대통령의 해명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이들의 인식 속에서 대통령에 대한 탄핵은 JTBC의 태블릿PC 보도로 시작된 ‘거대한 음모’일 뿐이다.

그런데 JTBC의 태블릿PC에 대해선 최근 태도가 바뀐 조선일보도 별다른 의혹 제기를 하지 못하고 있다. 조선일보는 이날 지면 기사에서 문제의 태블릿PC의 “여전한 5대 논란”에 대해 보도했는데, 의문을 제기하는 측과 검찰의 해명을 병렬적으로 나열한 수준이다. 이 기사에서 검찰은 태블릿PC는 최순실 소유로 봐야 하고, 파일을 옮겨 심는 등 조작된 흔적은 없으며, JTBC 기자가 더블루K 사무실에 출입하는 CCTV 동영상도 확인했다고 해명하고 있다.

다만, ‘고영태 기획설’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를 남겨놓고 있는데 JTBC측이 “누군가가 (PC를) 줬다는 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라고 한 것에 “검찰은 이 문제에 대해 특별한 설명을 내놓지 않고 있다”고 서술한 부분이 그렇다. 조선일보는 이 기사가 실린 것과 같은 지면에 고영태 씨가 ‘고발자’로 등장했지만 ‘기획 폭로’한 정황도 드러났다는 취지의 기사를 함께 실었다.

그러나 고영태 씨가 기획을 했든 의인으로 등장했든 중요한 것은 그가 내놓은 사실들이 무엇을 가리키느냐이다. 헌법재판소 탄핵심판에서 대통령 대리인단은 수차례 “고영태와 최순실의 불륜이 사건의 발단”이라고 주장했으나, 중요한 것은 그들이 무엇을 했느냐가 아니라 대통령이 무엇을 했느냐이다. 대통령 대리인단과 음모론적 세계관을 갖고 있는 ‘태극기 집회’ 참가자들은 검찰이 고영태 씨의 ‘기획 폭로’ 정황이 담긴 통화녹음파일을 검찰이 일부러 숨겼다는 식으로 주장하고 있으나 오히려 검찰은 이 파일의 존재가 최순실 씨의 국정농단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으며 증거가 될 수 있는 부분은 모두 법원에 제출했다고 해명하고 있다.

대통령 대리인단이 제기하는 ‘절차적 문제’ 역시 기존의 방식으로는 해소가 안 되는 쟁점임이 분명하다. 국회 탄핵소추위원장을 맡고 있는 권성동 의원은 26일 대통령 대리인단이 “헌법재판소 8인 체제 결정은 재심 사유”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에 대해 “헌재에서 8인 재판관으로 이뤄진 결정이 무수히 많고 8인 재판관으로 이뤄진 재판이 위헌이 아니라는 결정도 있었다”, “단심 재판이기 때문에 재심은 허용하지 않는다는 게 일관된 입장”이라고 반박한 바 있다.

또, 권성동 의원은 대통령 대리인단이 국회의 탄핵소추안 처리 과정에서 탄핵 사유별 표결을 하지 않은 것을 헌법 위반이라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도 “국회법에 건건이 별개로 탄핵소추하라는 내용이 없다”, “헌재도 탄핵 소추 사유별로 하지 않아도 위헌이 아니라는 결정을 한 사례가 있다”고 설명한 바 있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심판 최종 변론기일인 27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앞에서 탄핵찬성(왼쪽)과 탄핵반대(오른쪽)를 주장하는 시민들이 각각 집회하고 있다. (연합뉴스)

결국 이상의 상황을 종합하면 대통령 대리인단의 주장은 조악한 수준의 억지 음모론에 지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자신에 대한 법적 대리 행위가 이런 식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지 의문이 생길 지경이다. 이러한 음모론에 기반 한 현실인식은 대중에 대한 호소력은 있을지 몰라도 법리를 다루는 데에는 별로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탄핵이 인용되든 기각되든, 조기 대선 이후 어느 정부가 들어서든 사태 수습은 단기간에 불가능하다. 권력의 생리에 민감한 보수언론 전체가 이러한 우려를 입을 모아 언급하고 있을 정도다. 여러모로 볼 때 정권교체는 거의 기정사실화 된 상황인데, 이를 잘 아는 박근혜 대통령이 극성스러운 ‘태극기 여론’을 등에 업고 차기 정부에서 ‘사면’을 압박하기 위한 포석을 두고 있는 것 아닌지도 의문이다. 그러나 한 나라의 대통령직에 오른 사람이 이런 식의 저열한 판단과 계산을 하고 있다고 믿기는 너무나 어렵다.

하도 이해가 되지 않으니 ‘대통령 환자론’까지 나온다. 27일 중앙일보 지면에는 박근혜 대통령이 당선인이던 시절 일각에서 정신과 치료를 의뢰했다는 충격적인 내용의 칼럼이 실렸다. 박근혜 대통령이 10·26 등으로 인한 트라우마로 청와대에 들어가지 않으려고 해 전문가 치료를 모색할 정도였다는 얘기다. 지난해 말 국회의 국정조사 청문회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부신기능저하증’을 앓고 있다는 의혹 제기가 나온 것도 동일한 맥락이다.

대통령의 행위가 오죽 이해가 되지 않으면 이런 얘기를 하겠는가. 더 큰 문제는 집권 여당이 이런 비상식과 무책임에 일말의 문제의식도 갖고 있지 않아 보인다는 것이다. 28일 자유한국당 김진태 의원은 MBC라디오에 출연해 헌법재판소에서 탄핵이 각하되거나 기각될 가능성을 언급하면서 “지금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세상이 된다. 정권 다 넘어간 것으로 그렇게 착각하지 말라. 승부는 지금부터”라고 했다. 이쯤 되면 말이 안 나올 지경이다. 정권과 여당의 주요 인사들이 ‘단체로 병에 걸렸다’고 밖에 말할 수 없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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