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게 전쟁이고 세상이 만만하지 않다"

‘흙수저’들에게는 날마다 부닥치는 현실이고, ‘금수저’도 한 번쯤은 머리를 끄덕여봤을 법한 얘기다. 사는 세계가 다른 ‘다이아몬드 수저’에게는 고대 수메르 설형문자일 테지만 말이다. “산다는 게 다 그런 거 아니겠니”라는 어느 유행가 가사에 묻어있던 ‘그러려니’ 하는 낭만의 냄새는 툭 하면 입에서 나오는 ‘에이 씨~’와 ‘체념 속 울화’가 되고 말았다.

세상 돌아가는 꼬락서니가 그렇다. 대선을 앞두고 여러 후보들이 내거는 많은 약속들에도 ‘사는 게 전쟁’이다. 마지막까지 ‘저게 대통령인가?’ 싶을 정도로 부리는 패악질에 울화는 몇 곱절이 된다. 실현될까라는 의구심을 품으며 ‘대세’가 누구인지에 관심을 갖는다. “‘희망 고문’, 한 번 더 당해보지 뭐!”,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을지 싶다. 때마침 촛불까지 타올랐으니, 한 번 더 품어 봐도 나쁠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독일 방문중 17일 뮌헨에서 기자회견을 가진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연합뉴스]

다가오는 대선을 앞두고 나오는 솔깃한 약속들이 쏟아지고 있다. 서슬 퍼런 ‘무노동 무임금’ 원칙이 있는데도 보편적 시민소득(기본소득 )은 사람들의 입에 널리 오르내린다. 이전에는 종북 빨갱이으로 몰릴 법한데 어째 그런 분위기가 아니다. 미국 실리콘밸리에서도 필요성을 주장한다는 든든한 응원군이 있는 것도 여기에 한 몫 거드는 건 분명하다. 최근에는 빌 게이츠까지 ‘로봇세’ 도입에 찬성하는 일까지 발생했다. 뭔가 단단히 ‘큰 놈’이 몰려온다는 생각을 들게 하기에 충분하다. 게다가, 한국은 세계 제1의 (기계로서의) 로봇 사용국가다.

창출되는 일자리보다 없어지는 일자리가 몇 배에 이를 것이라는 진단이 대세다. 이렇게 4차 산업혁명으로 불리는 ‘알파고 시대’는 두려움으로 다가오고 있다. 그렇게 볼 문제는 아니라는 반론이 있기는 하지만 그리 신뢰는 가지 않는다. 이전에 노동절약적 기계가 도입될 때는 다른 분야에서 창출되는 일자리로 상쇄됐는데, 알파고 시대는 ‘생산-소비-서비스’ 전체를 지능형 인터넷으로 묶이는 것을 핵심으로 한다니 말이다. 모든 분야가 노동 절약 대상이라는 얘기다.

역발상을 제기하며 두려움을 떨쳐내려는 시도도 있다. 노예제에 기반해 찬란한 민주주의를 꽃피웠던 고대 그리스 시대가 다시 도래할 가능성이 열리고 있다는 식의 얘기들이 여기에 속한다. 인공지능과 로봇이 노예제 기반 구실을 하면서, 모든 시민이 철학자이자 정치가가 되는, 정치에 참여하는 것이 시민의 기본 덕목이 되는 그런 세상의 물적 기반이 형성되고 있다고 보자는 얘기다.

충분히 동의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세상은 결코 오지 않는다는 게 내 생각이다. 힘의 관계가 바뀌고 만만하지 않은 세상의 운영원리가 바뀌지 않는 한, 경제적 파국을 통해 자본주의가 스스로 붕괴하는 ‘최종 심급의 경제 결정’의 시간이 오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어떤 미래학자는 “과거의 미래는 미래이고, 현재의 미래는 과거이며, 미래의 미래는 현재”라는 알쏭달쏭한 말을 했다. 미래란 과거와 현재가 섞여 있는 것이고, 미래란 인간의 적극적인 역할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라는 의미를 지닌 것일 게다. E. H 카가 말한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의 또 다른 표현이라고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중에서도 ‘현재의 미래는 과거’라는 말이 머리에 쏙 들어온다. 16세기 양모 생산을 늘리기 위해 농지를 목장으로 바꾸면서 ‘양이 사람(농민)을 잡아먹던(쫓아내던)’ 엔클로저 운동 시절로 타임머신을 타고 방문해 보자. 양모생산을 통한 이익은 지주에게 전적으로 귀속됐고, 농민들은 쫓겨나고 실업자가 되어 도시로 이동해 노동자가 됐다. 폭력적인 이 과정은 ‘자본의 시초 축적’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문제는 자본의 이런 폭력적인 시초 축적이 과거의 일이 아니라 지금도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대로 두면 알파고 시대 역시 엔클로저 운동 때와 같은 결과가 빚어진다. ‘현재의 미래는 과거’인 것이다.

연합뉴스 자료 사진

눈으로 확인하도 있듯이, 알파고 시대를 열어젖힌 건 결국 기업 간 글로벌 경쟁이다. 기업들이 인공지능 로봇 혹은 컴퓨터가 사람에 비해 훨씬 뛰어난 수준의 생산성을 보일 것이란 가능성에 주목한 게 핵심이다. 산업의 헤게모니를 놓치지 않기 위한 국가 간 경쟁도 여기에 한 몫을 차지한다. 지금의 분배시스템 아래에서 인공지능과 로봇을 이용해 나오는 이익은 어떻게 처리될지 분명하다. 지금대로라면 이익은 기업에게 전적으로 속한다. 노동자로서 사람은 없거나 대폭 줄었으니, 인건비라고 할 만한 게 없다. 국가는 이 이익에 세금을 매겨 재분배할 뿐이다. 로봇세는 그런 재분배의 한 형태다.

하지만 여기서 그칠 수는 없을 듯하다. 4차 산업혁명과 알파고 시대의 본성이 그렇다. 지능형 인터넷으로 연결된 생산-소비-서비스 시스템은 블특정 다수의 모든 인간의 정보가 없으면 돌아가지 않는다. 그렇기에 이 자본주의 시스템의 ‘사회성’은 이전에 비할 바가 아닐 정도로 극대에 이른다. 이 시스템을 통해 만들어진 이익이 기업에 전적으로 귀속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로봇세를 통한 재분배에 국한될 수도 없다. 로봇세를 통한 세수를 주요 재원으로 하는, 노동 여부에 관계없이 지급하는 기본소득에 국한될 수도 없다. 그것은 재분배의 영역이다. 게다가, 별다른 주목을 하지 않지만 기본소득의 위험성은 노동 유인의 약화보다는 기본소득을 핑계로 인건비를 낮추려 하는 기업들의 심각한 도덕적 해이를 부추길 위험성이 오히려 더 크다.

독일에서는 ‘플랫폼 인더스트리 4.0’에 대응한 ‘노동 4.0’이 논의되고 있다. 노동 4.0의 내용은 다차원적이다. 넘겨줄 건 넘겨주되 기존 공정과 직무를 재조합해 일자리를 유지할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에서부터 남는 일자리에 대한 공유의 원칙을 확립하는 것까지 다양할 수 있다. 여기에 인간노동을 대체하는 지능형 로봇에 대한 소유권을 누구에게 부여할 거냐는 문제까지 추가할 필요가 있다. 노동력이 인간과 분리될 수 없는 인격 그 자체였다면, 지능형 로봇 역시 인간 노동력의 연장에서 바라봐야 하며, 그 분리불능성은 인간(들)의 지능형 로봇에 대한 소유권을 보장하는 것까지 열어놔야 한다는 것이다.

4차 산업혁명 시대의 핵심은 인간과 분리할 수 없는 노동력을 자본으로 흡수해 일체화시키는 폭과 깊이가 이전과는 질적으로 다른 데 있다. 인공지능과 로봇이 상징하는 물리 시스템을 기존의 ‘자본 장비’로 인정하면서 기존의 소유・분배 관념을 유지할 것인가, 아니면 다른 소유‧분배의 원리를 사고할 것인지, 이것이 문제다. 로봇세에 대한 찬성 여부는 이에 대한 아무런 답도 주지 못한다. 농지개혁을 통해 지주-소작제를 개혁해 자작농에 입각한 경자유전의 원칙을 실현했다면, 4차 산업혁명에도 그런 비슷한 개혁이 필요할지 모른다. 그렇게 될 때 시민소득으로서의 기본소득은 민주주의를 만개하는 밑거름으로 작용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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