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김정남을 암살했다는 정황이 사실에 가까워지면서 이 사건이 국내 정치에 미칠 영향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고 있다. 보수언론을 포함한 보수세력이 이 사건을 ‘안보 문제’로 만들어 일정한 정치적 효과를 거두려고 하는 모습도 포착된다. 그런데 이런 시도가 실제로 대선 구도에 얼마나 영향을 미칠 것인지는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보수언론의 16일 사설을 보면 김정남 살해를 ‘안보 문제’로 만들고 싶은 기류가 명백하다. 조선일보는 이날 사설에서 “핵·미사일을 쥐고 있는 북 집단이 광포하기까지 하니 안보 불안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드물 것”이라면서 “야권 대선 주자들은 최순실 사태를 기화로 대북 정책까지 북 정권을 연명시키고 핵폭탄을 낳은 햇볕 시대로 되돌리려 하고 있다”고 썼다.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가 이번 사건에 대해 북한을 직접적으로 비난하고 국민의당과 안철수 전 대표가 사실상 사드 배치 반대 입장에 대한 변화 기류를 나타내고 있지만 이들이 집권할 경우 ‘햇볕정책’이 재개될 것은 분명하다는 점에 대해 따져봐야 한다는 거다.

조선일보 16일자 사설

보수언론의 나머지 두 신문들의 경우 햇볕정책에 대한 입장까지 언급하진 않았으나 이 사건에 대한 위기감을 강하게 드러낸 것은 마찬가지였다. 동아일보는 “김정남 독살은 우리 정부 요인 등 사회지도층은 물론 탈북자 사회 전체에 대한 공개적인 테러 협박이나 다름없다”면서 “정부가 김정남 피살 소식이 전해진 14일 밤 국가안전보장회의(NSC)까지 열 필요는 없다고 하다 어제서야 회의를 연 것은 사태를 너무 안이하게 보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을 키운다. 국가 리더십 공백으로 불안한 국민을 더욱 걱정하게 만들어선 안 된다”고 지적했다.

중앙일보 역시 이날 사설에서 “자신의 정권 안위를 위해 혈육마저 무참히 처단하는 북한의 야만성을 보면서 우리는 북한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와 각오를 철저하게 새로이 다져야 한다”면서 “사드 도입 등 우리 안보를 강화하는 조치에 국론 분열이 있어선 안 될 것”이라고 썼다.

냉정히 따져볼 필요가 있다. 북한이 김정남을 살해한 사건은 국내외적으로 큰 의미를 갖는 사건임이 분명하다. 트럼프 정부가 일본과의 친교를 과시하며 중국에 대한 압박을 강화하는 상황에서 북한이 중국의 통제력을 약화시킬 수 있는 사건을 연이어 일으킨 것이기 때문이다. 중국은 이미 북한의 중거리탄도미사일 발사 시험에 대해 이례적으로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북한의 이러한 태도가 한반도 사드 배치 명분을 강화하고 미국에게 외교적 구실을 주는 것이 될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같은 시기 김정남이 살해됐다. 당분간 북한과 중국의 관계는 냉기가 돌 수밖에 없다. 당장 보수언론들도 지면에서 같은 내용의 분석을 내놓고 있다. 그러니 김정남 암살을 소재로 한 정책적 모색은 햇볕정책이나 사드 배치가 아니라 바로 이 대목에서 한국이 어떤 외교적 수단으로 상황 관리에 나설 것이냐에 집중되는 게 옳다.

‘햇볕정책’이란 용어는 대북정책의 큰 틀을 말하는 것이고 사드는 미사일 요격 수단에 불과하다. 김정남은 미사일에 살해된 것도 아니고 햇볕정책 때문에 암살된 것도 아니다. 예를 들어 조선일보는 “북의 야만 집단과도 협상은 해야 한다”고 하는데, 금강산 관광 등을 언급하지 않고 도대체 ‘북의 야만 집단’과 어떤 협상을 시작할 수 있겠는가. 한국 정부가 “협상은 해야 한다”라고 하는 순간 조선일보가 중요시하는 유엔의 대북 제재는 일정 정도 힘이 빠질 수밖에 없다. 유엔의 대북제재를 유지해 북한 정권을 파멸로 몰고 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아무런 협상도 하지 않으면서, 우리를 앞질러 남이 그들을 도와주지 않기를 바라며 기도하는 것 밖에 없다. 그 과정에서 북한이 핵실험이나 미사일 발사 시험 등의 군사적 도발로 일관하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일본이 주기적으로 납북자 문제를 고리로 북한과의 협상 국면을 조성하는 것에 이유가 없는 게 아니다.

북한이 정상국가가 아니고 그들의 지도자가 괴이한 결정을 자주 내린다는 것은 지난 60년간 ‘사실’로서 받아들여져 왔다.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일반 상식으로 이해되지 않는 일을 할 때마다 보수언론이 ‘안보 위기’를 언급하며 보다 강경한 대북정책이 필요하다는 식의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히스테리적 태도로까지 보인다. 이는 기본적으로 보수언론의 ‘논조’에 해당하는 문제지만 이면에 정파적 판단이 작용했다는 점을 부인할 수도 없을 것 같다.

15일 오전 서울역에서 시민들이 북한 김정남 사망 관련 뉴스를 보고 있다. (연합뉴스)

야권 지지자들은 이번 사건이 ‘북풍’이 될 것을 우려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15일부터 대선후보 경선을 위한 선거인단 모집을 시작했다. 하루 만에 20만 이상의 유권자들이 몰렸다. 기대 이상의 흥행이라는 평가지만 선거인단 모집 선언식은 취소됐다. 김정남 암살 문제 때문이다. 국민의당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사드 배치 반대’인 당론 수정 여부를 논의하기로 했다. 정동영 의원 등이 반대하는 상황에서 당론 수정이 관철될 것인지는 의문이지만 안철수 전 대표가 “전시작전권 환수 논의는 시기상조”라고 한 것을 보면 일정한 후퇴 분위기가 있는 게 사실이다.

과연 김정남 암살이 ‘북풍’이란 형식으로 작용할 것인지는 의문이다. 왜냐하면 이런 일련의 분위기 속에는 야권에 대한 ‘불안감’보다는 야권 지지자들의 ‘위기감’이 더 큰 걸로 보이기 때문이다. 정권교체를 해야 하는데 북한이 일으킨 일로 무위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니 경계심이 커질 수밖에 없다. 2012년 박근혜 대통령이 당선 당시를 떠올리는 사람들도 있다. 그때 야권 지지자들이 안이했기 때문에 정권교체에 실패했고, 이게 결국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까지 이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번만큼은 기득권의 얕은 수에 넘어가지 말자는 게 이번 사건을 대하는 야권 지지자들 일각의 정서다.

이런 상황을 고려할 때 ‘북풍’의 위력은 크지 않을 것이다. 이미 기성 언론들도 “북풍의 위력이 예전 같지는 않을 것”이라고들 진단하고 있다. 천안함 피격 이후 실시된 2010년 6월 지방선거 결과가 이를 방증한다. 유례없는 안보위기 속에 치러진 선거에서도 야권은 기록적인 승리를 거뒀다.

물론 여야의 이해득실이 전부는 아니다. 가장 큰 문제는 보수언론에 의해 대북정책 전체가 희화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과거 덩샤오핑은 중국의 경제정책을 일신하며 ‘흑묘백묘론’을 꺼냈다. 한국의 처지에서 같은 주장이 적용될 필요가 있는 분야가 바로 대북정책과 외교정책이다. 북한붕괴론이냐 햇볕정책이냐의 양자택일이 아니라 도그마에 갇히지 않는 자유로운 발상이 필요한 시점이다. 보수언론의 정파적 히스테리는 바로 이런 것이 가능한 풍토가 조성되는 걸 가로막고 있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럴 것인지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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