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해 보자. 곧 있을 더민주당 대통령후보 경선에서 안희정 충남도지사가 문재인 전 대표에게 승리를 거둬 대선후보가 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말이다(이하 편의상 존칭 생략). 안희정의 대연정 제안이 호응을 얻은 것이라는 식의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도대체 정당의 정체성은 무엇이며, 정강이나 정책은 왜 있느냐는 물음에 휩싸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매일경제와 MBN이 여론조사기관 리얼미터에 의뢰해 14일 발표한 결과를 보면, 오늘부터 시작될 선거인담 모집에 참여하겠다는 응답자가 31.6%였고, 이 가운데 자신의 이념 성향을 진보라고 밝힌 층이 44.4%, 중도 34.2%, 보수 26.7%였다고 한다. 더민주당 대선후보를 뽑는 경선에 중도나 보수 성향 유권자 더 많이 참여한다는 얘기인 셈이다.

안희정 충남지사와 문재인 전 대표(연합뉴스)

흥미로운 일이다. 일단은 수구세력의 반응이 어떤지에 관심이 간다. 쪼개지기 전에는 비박신당(바른정당)과 함께 이구동성으로, 쪼개진 뒤에는 한국자유당으로 간판을 바꿔 탄 수구세력의 본산 새누리당이 틈만 나면 좌파정권만은 안 된다고 핏대를 세우던 단골 메뉴이기 때문이다. 정진석 한국자유당 원내대표가 안희정 지사의 대연정 제안 발언에 환영을 아끼지 않은 것에 비춰보면, 감상평은 자명하다. 블랙 코미디다. 그동안 수구세력이 해왔던 주장이 거의 ‘참주선동’에 가까웠음을 증명한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물론 수구세력이 빠져나갈 구석은 얼마든지 있다. 정당은 정당이고 사람에 대한 호감은 다르다는 식으로 말이다. 문재인 하고는 말이 안 통하고 안희정 하고는 통한다는 말도 되겠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관심사는 이게 아니다. 안희정이 더민주당의 대선후보가 된다는 것이 주는 함의다. 더민주당 대선후보는 이 정당의 지지층이 아닌 중도나 보수 성향의 유권자가 결정했다는, 매우 곤혹스러운 결과와 마주쳐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결과가 빚어진다면, 그것은 일차적으로 ‘완전 국민경선제’에서 비롯한다. 한 정당의 당원이 아니더라도 일반 국민, 심지어 이 정당을 지지하거나 호감을 갖지 않는 국민이라고 하더라도 더민주당의 대선 후보 결정에 동등한 권한을 갖게 한다는 것이 얼핏 보면 매우 민주적으로 비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대한민국 정당은 대통령이라는 특정 개인이 좌우해 왔다는, 제왕적 대통령제의 그림자를 엿보게 하는 편린이 아닐까 싶다.

역사적으로 보면 우리나라에서 국민경선제 도입은 미국 대선의 ‘오픈 프라이머리’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제도의 맥락과 관행은 전혀 다르다. 미국 대선의 오픈 프라이머리에 참여하는 국민은 대개가 민주당 당원이거나 공화당 당원이다. 이를 의식해 그동안 국민경선제를 도입하더라도 일반국민의 참여비율에 제한을 뒀다. 완전 국민경선제가 아니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2년 민주당 대선 후보가 될 때 국민경선제의 규칙은 당원 50%, 일반국민 50%였다. 2007년 대통합신당 예비경선에서도 비록 줄어들긴 했지만 국민여론조사 50%, 선거인단여론조사 50%(이중 당원 비중 30%포인트)였다.

안희정이 후보로 선발된다면, 더민주당은 상당한 심리적 아노미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 일단은 대선을 치르느라 정신이 없겠지만, 상당한 후과는 불가피해 보인다. 정당이란 무엇인지, 정당의 정체성은 무엇인지에 대해 깊은 물음을 던질 수밖에 없는 일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누가 봐도 안희정의 ‘대연정’ 발언은 더민주당의 지지층이 아닌 국민들을 향해 선거인단으로 등록해 판을 흔들어달라는 식의 신호를 보낸 것으로밖에 풀이할 수 없어서다. 문재인이 후보가 된다면, 그는 안희정과 벌인 이벤트를 외연 확장에 맘껏 활용하려 할 테지만 얼마나 통할지는 모르겠다. ‘짜고 치는 고스톱’ 판을 벌인 믿지 못할 사람이라는 인상만 강해지지 않을까 싶다.

완전 국민경선제는 가장 경쟁력 있는 후보를 선발하기 위한 더민주당 후보들 간 합의의 결과일 것이다. 1차 투표 과반이 없을 때 결선투표까지 도입했다. 대세론을 자임하는 문재인이 어지간한 자신감이 아니었다면 여기에 동의하기는 쉽지 않았을 터다. 소속 정당을 지지하지 않는 사람들에게까지 후보를 선출할 동등한 권한을 주는 배포까지 엿보인다. 미리 치르는 미니 대통령선거로 배치했다는 생각까지도 든다. 문과 안이 ‘짜고 치는’ 고스톱이 아니냐는 의심마저 들게 할 정도다. 개인적으론 문이 안에게 당했다는 생각이지만 말이다.

공교롭게도, 문재인도 안희정도 결선투표제 도입에 대해서는 개헌 사항이라고 발뺌하는 데 일치한다. 더민주당 원내대표를 맡고 있는 우상호도 마찬가지다. 연정이니 연립정부니 하는 말을 꺼내지만, 깨끗이 경쟁하면서 야당 간 연정이나 연립정부를 제도로서 가능하게 하는 결선투표제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결선투표제가 개헌 사항인지 아닌지는 세력관계에 달려있다고 봐야 한다. 문재인이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이면서 불과 2~3년 전까지만 해도 법률 개정 사항이라고 했던 상당수 헌법학자들이 태도를 바꿨다. 정치권의 눈치를 보고 있는 것이다.

지난 1월까지만 해도 여러 개혁 입법을 통과시키려는 움직임이 분주하다는 언론보도를 심심찮게 접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감감 무소식이다. 모두 손 놓고 있다는 말이 들려온다. 도대체 뭐 하자는 건지 모르겠다. 야당 대선 후보들이 내세우는 공약들에 그다지 신뢰가 가지 않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나중에 잘하겠다는 소리 대신에 처리할 수 있는 건 신속히 처리하는 게 맞다. 안철수 말마따나 지금은 놓치면 후회하는 ‘골든 타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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