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쯤되면 ‘내전’이라고 불러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자유총연맹, 고엽제전우회, 재향경우회 등 보수단체들이 일제히 총동원령을 내려 3월 1일 광화문에서 대형 집회를 개최하려 했다는 소식을 보고 든 생각이다. 특히 이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자유총연맹은 각 지역 지부에 공문을 보내 동원령을 내렸다고 한다. 한겨레는 김경재 자유총연맹 회장이 “자유총연맹이 지금까지 한 번도 구국 집회를 하지 않았지만 이번에 처음으로 동원 능력을 시험해보려고 한다”고 발언했다고 전하고 있다. 정부 지원금을 받는 관변단체가 박근혜 대통령 탄핵 반대 운동에 조직적으로 나서겠다는 입장을 천명한 것이다.

물론 이들에게도 집회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하기 때문에, 이런 형태의 ‘맞불 집회’를 원천적으로 차단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 다만 정치적 차원에서 따질 부분은 분명히 따질 필요가 있다. 최근 언론들은 박근혜 정권이 전경련을 통해 보수단체들을 조직적으로 동원해 사실상의 여론조작을 행해왔다는 의혹을 보도해왔다. 이런 식으로 재정을 지원받은 단체의 주요 인사들이 지금의 탄핵 반대 집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유총연맹은 공직선거법 등을 통해 정치적 중립 의무를 부과받는 정부 지원 대상 법정 단체이다. 이러한 사실들을 하나로 꿰어 맞추면 ‘관제데모’를 둘러싼 문제는 탄핵 반대 여론을 정권이 조직적 차원에서 부풀리고 있다는 의심을 갖게 한다.

일단 자유총연맹은 나름대로 정치적 중립을 지키겠다는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이들은 보도자료를 통해 “매년 3·1절에 애국 보수단체와 함께 국가정체성 확립 행사에 참여했다”, “(집회 참여는) 대통령 탄핵반대 집회가 아닌 ‘태극기 국민운동’이라는 행사취지에 공감한 데 따른 것”이라고 주장했다. 연합뉴스 등 보도에 의하면 탄핵 반대 집회에서 강경한 발언을 해왔던 김경재 자유총연맹 회장도 “탄핵에 반대한다는 최근의 내 발언은 자유총연맹 회장이 아닌 개인의 자격으로 했던 주장”이라며 “이번 집회에서 탄핵반대와 관련한 메시지를 내는 것에는 조심스럽게 임할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앞서의 맥락이 있기 때문에 이런 해명은 자유총연맹의 행보를 둘러싼 의구심을 해소하기에는 충분치 못한 걸로 보인다.

그런데 보수단체 등 ‘조직된 아스팔트 우파’의 문제를 차치하더라도 탄핵 반대 여론이 실체화하고 있는 현상 자체에는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실제로 이러한 흐름은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가 각종 여론조사에서 15%를 넘나드는 지지율을 확보하는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선거법과 정치자금법상 선거에서 15% 이상을 득표하면 선거비용 전액을 보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15%를 넘길 가능성을 보이느냐 마느냐는 출마를 결심하는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 이 현상을 만드는 동력이 탄핵 반대 여론이라는 걸 부정할 수는 없다.

8일 오후 대구시 중구 덕산동 동아백화점 쇼핑점 앞에서 열린 국가안보정상화 촉구대회에서 참가자들이 태극기를 흔들고 있다. (연합뉴스)

이 여론이 형성되는 매커니즘은 무엇일까. 언론은 박근혜 정권을 지지했던 노령층 유권자들이 박근혜 대통령의 운명을 자기 세대의 존재의의와 동일시하고 있다는 취지의 보도를 하고 있다. 언론이 전하는 이들의 주장을 요약하자면, 대통령에 대한 탄핵 찬반의 문제가 아니라 기성 세대의 성취 자체를 부정하는 듯한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태극기 집회에 참석한다는 것이다. 이를 ‘종북 세력’의 집권을 막아야 한다는 당위로 설명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촛불 집회로 대표되는 정치적 흐름은 박근혜 정권의 헌정유린과 파탄적 국정운영에 문제제기를 하자는 것이지 기성세대를 부정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어떤 측면에서 촛불 집회는 과거와의 단절을 목표로 해야 할 필요가 제기되는 것도 사실이다. 이를테면 “이제는 박정희를 청산하자”고 말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아버지의 명예를 되찾기 위해’ 정치를 시작했고 이를 위한 정책을 추진하였으나 결과적으로는 국정농단 사태로 귀결되었으므로 오랜 과거인 박정희 체제에 대한 청산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야권에서 ‘대청소’ 등의 표현이 등장하는 것도 이런 측면이 크다. 이를 앞에서 설명한 고령층의 반발과 함께 보면, 결국 이 ‘세대 전쟁’은 박정희 체제라는 가치와 노선을 둘러싼 힘겨루기로 볼 수도 있는 셈이다.

만일 상황이 이렇다면 박정희 체제를 청산하자는 게 과연 무엇을 하자는 것인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 박정희 체제의 가장 큰 특징은 목표를 이루기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경제발전을 위해 개인의 자유를 억압했다는 게 대표적이다. 경제발전을 위해 독재를 했고 반대파를 짓밟았으며 노동자들을 착취했고 일본과의 과거사 청산을 졸속으로 마무리 했다. 부족한 쌀의 소비를 줄이기 위해 국민 한 사람이 먹는 쌀밥의 양까지 제한한 것은 그야말로 웃지 못할 일로 볼 수밖에 없다.

이런 기준으로 보면 민주 정부 10년 동안에도 박정희 체제는 완전히 청산되지 못했다. 2014년 세월호 참사는 민주 정부 10년을 겪고도 유지된 박정희 체제가 국민의 생명을 어떻게까지 취급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 사건이다. 바람직한 체제는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데 물질이 기여하지만, 박정희 체제에서는 사람의 생명이 물질에 복무한다. 이렇게 보면 태극기 집회에 참여하는 노인들은 물질을 위해 사람을 희생하던 시대가 옳았다고 믿는 것 같다.

이들의 ‘물질적 풍요를 이룰 수 있다면 인권을 포함한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다는’ 신념은 ‘인권을 포함한 모든 것을 희생하지 않으면 물질적 풍요를 이룰 수 없다’는 논리로 전도된다. 그리고 이런 믿음의 배경에는 인권이나 입헌주의와 같은 자유주의적 가치를 말하는 목소리에 대한 근본적 냉소와 불신이 깔려있다. ‘상대가 원리원칙을 내세우는 건 결국 나를 속이고 사익을 추구하기 위한 것’이라는 내용의 음모론적 반지성주의가 작동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기득권이 이런 대중적 음모론의 재료를 반복해서 생산해내고 있다는 점이다. 10일 언론은 고영태 씨가 측근인 김 모 씨와 통화한 내용을 앞 다투어 보도하고 있다. 최순실 씨가 점지한 사무총장을 몰아내고 K스포츠재단을 독점하기 위한 음모를 꾸몄다는 내용이다. 이는 고영태 씨가 최순실 씨와 불륜 관계였다는 식의 주장과 엮여 ‘불순한 의도’의 증거처럼 소비되고 있다. 이 모든 사태가 고영태 한 사람의 음모로부터 시작됐고 박근혜 대통령은 억울한 처지라는 것이다.

정치적 냉소주의의 마법(?)이 힘을 발휘하는 것은 이 대목이다. ‘상대가 음모적으로 행동하고 있으므로 나도 음모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는 논리가 서는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과 최순실 씨는 바로 이러한 논리 위에서 움직이고 있다. 이 모든 것이 고영태 일당과 야권의 음모이며 정치적 공격이므로 우리도 ‘게임의 논리’로 대항하지 않으면 패배한다는 인식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한줌의 부끄러움도 없이 노골적인 지연작전과 억지 논리로 대한민국의 사법체계와 일대 결전을 벌이는 것의 배경에는 이 점이 작용하지 않나 한다.

서두에 언급한 보수단체들의 행위도 마찬가지다. 신의성실한 논리로 따지자면 이들의 ‘백만 태극기’ 계획은 무리수이다. 관제집회라는 비판을 피해갈 수도 없다. 본인들도 그걸 알지만 ‘상대가 음모적’이라는 이유로 이를 강행한다. 여기서 대통령의 헌정유린 문제는 똥 묻는 두 마리 개가 싸우는 저질스런 흙탕물 싸움으로 변모한다.

다시 문제의 핵심을 대통령의 헌정유린으로 돌려놓기 위해서는 언론부터 잘해야 한다. 문제의 핵심이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헌정유린 사태에 있음을 상기하고 문제의 여러 차원을 맥락에 맞게 분류해 재정렬하고 이에 대해 논해야 한다. 그런데 기성언론은 또 팔짱을 끼고 서서 헌법재판소의 결론에 따르지 않을 움직임을 보이는 정치세력은 퇴출시켜야 한다는 식의 편리한 중립을 찾아 움직이고 있다. 그러나 여러 번 강조했듯 헌법재판소의 탄핵 심판 결과에 따르는 게 문제가 아니라 헌법재판소조차 제 기능을 다할 수 없는 이 체제가 문제이다. 언론이 이 문제와 정면으로 맞서지 못하면 ‘내전’은 언제까지고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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