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재판소가 박근혜 대통령 대리인단이 요구한 증인 중 절반 이상을 채택하고 특검의 박근혜 대통령 대면조사에도 잡음이 일어나면서 상황이 심상찮게 돌아가고 있다. 야권은 이런 상황에 우려를 나타내며 국민을 향한 직접적 호소에 돌입했다. 그러나 보수언론은 이를 ‘촛불 선동’으로 규정하는 상황이다.

동아일보는 8일자 사설에서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와 이재명 성남시장 등이 빠른 탄핵 인용 결정을 촉구한 것을 두고 “문 전 대표와 이 시장의 무리한 헌재 압박은 촛불의 동력이 떨어지면서 지지율이 정체되자 선동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라고 썼다. 동아일보는 “선동에 빌미를 준 것은 박 대통령”이라면서 “헌재가 광장의 ‘촛불’과 ‘태극기’에 휘둘리지 말고 헌법과 법률, 법관의 양심에 따라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정치권도, 국민도 도와야 한다”라고도 썼다.

동아일보 사설의 논리 전개 자체는 크게 무리한 것으로 보이지 않지만, 야권의 대응을 ‘선동’으로 규정하는 시각은 문제다. 이는 다른 보수언론도 노골적으로 말하지 않더라도 공유하고 있는 바다. 보수언론들은 그간 헌법재판소가 법리에만 충실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며 정치권과 ‘촛불 시민’들에 자제를 요구해왔다.

6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월요 시국미사에서 참가자들이 전기 촛불을 들고 있다. (연합뉴스)

‘선동’의 사전적 의미는 “남을 부추겨 어떤 일이나 행동에 나서도록 함”이다. 그런데 일상 어법에서 ‘선동’이라는 표현에는 ‘속임수’의 의미도 포함돼있다.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로 믿게 만들어 대중이 행동에 나서도록 하고 이를 빌미로 자기는 사익을 취한다는 것이다.

특히 인터넷을 중심으로 한 일상 어법에서 ‘선동’에 대응하는 어휘가 ‘팩트’라는 것은 이런 인식의 존재를 뒷받침한다. 최근에 ‘팩트 폭력’이라는 말도 자주 쓰이는데, 예의나 인간관계의 문제를 고려치 않고 사실을 직설적으로 말해 남의 아픈 데를 찌른다는 뜻이다. 이의 전제는 ‘팩트 폭력’이 아닌 경우의 일상 어법에서는 예의나 인간관계, 즉 사적 차원에 의해 사실을 축소하거나 은폐하는 일이 일반적이라는 것이다.

보수세력은 특히 북한 문제를 소재로 이런 인식의 전파에 몰두해왔다. ‘종북’이란 겉보기에 이상주의자처럼 보이지만 북한 정권의 이해관계에 복무한다는 ‘본의’를 숨기는 사람이란 의미로 쓰인다. ‘빨갱이’도 마찬가지다. 전인범 전 특전사령관은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 캠프에 합류하면서 “빨갱이가 아니다”라고 했는데, 이는 어떤 사상적 검증을 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본심을 숨기고 북한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확인했다는 얘기다. 보수언론은 오랫동안 이런 식으로 ‘종북’이란 개념을 마구 휘둘러왔다.

그런데 최근에는 오히려 기성 언론들이 이 ‘선동’의 주역으로 평가받고 있다. 대표적인 예는 이른바 ‘태극기 집회’에 나선 사람들이다. 박근혜 대통령을 변함없이 지지하는 이 ‘아스팔트 우파’들은 현 시국을 기성 언론의 선동에 속아 넘어간 사람들의 문제로 인식하고 있다. 정치적 욕심이 있는 JTBC와 송희영 전 주필 등을 보호하기 위해 우병우 전 민정수석을 겨냥해야 했던 조선일보 등이 사익을 실현하기 위해 박근혜 대통령을 팔아 넘겼다는 것(?)이다. 이들의 관점에서 촛불 시위대는 ‘종북’이라는 본질을 숨기고 ‘헌정 유린’이란 구호를 내세우는 음모가들에게 이용당하고 있다. 촛불 시위에 ‘이석기 석방’ 등의 구호가 나오는 게 증거다. 이런 관점으로 보면 최순실 씨의 국정농단 의혹에 핏대를 세웠던 동아일보 역시 ‘선동’의 주역이다.

이런 현실의 결론은 ‘파국’일 뿐이다.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당선이 이를 방증한다. 도널드 트럼프는 미 대통령의 자리에 오른 이후에도 ‘대안적 팩트’ 등을 언급하며 기성 언론과의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전세계적 기준에서도 가장 큰 권력을 가진 사람이 기성 언론의 ‘선동’에 의해 피해를 받고 있다고 주장한다. 정치는 무너지고 대중 앞에 놓인 선택지는 남을 밟고 혼자 살아남는 것 외에는 남지 않는다.

시민혁명의 발원지로 꼽히는 프랑스에서도 유사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최근 언론은 5월 예정된 프랑스 대통령 선거 구도가 국민전선의 마린 르 펜과 무소속인 에마뉘엘 마크롱의 양자구도로 재편되고 있다고 보도하고 있다. 마린 르 펜은 기득권들이 세계화라는 명분을 내세운 ‘선동’으로 무슬림들에게 유럽을 팔아 넘기고 있다고 주장하는 대표적 인사이다. 에마뉘엘 마크롱은 포퓰리즘적 구호를 내세우고 있으나 신자유주의적 지향을 유지해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는 걸로 알려져 있다. 결국 프랑스 국민 앞에 놓인 선택지는 ‘전진 같은 후진’이냐 ‘퇴조를 앞둔 현상 유지’냐로 압축돼있는 셈이다. 현실의 문제를 직시하고 이를 해결하려는 정치는 실종돼버린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선동’과 ‘팩트’의 이분법은 문제를 해결하지도 못할뿐더러 애초의 문제를 더 좋지 않은 방향으로 끌고 가는 프레임을 만들기 십상이라는 것이다. 언론이 해야 할 일은 이런 냉소주의적 논의구도를 반복하는 게 아니라 문제의 핵심과 근본을 논하고 해결책을 논의할 수 있는 공론을 조성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야권의 대응을 그저 지지층을 결집시키기 위한, 탄핵 심판에 자신들에 유리한 영향을 주기 위한, 또는 중도층에 어필하기 위한 시도로만 분석해서는 이 진창을 빠져 나올 수가 없다. 야권이 촛불 시민들에게 호소할 수밖에 없는 것은 기성 정치 내에서 국정농단 의혹 등을 해소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회는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을 가결시킴으로써 자신들의 할 일을 했다. 이 과정에서 국민적 압력이 어떻게 얼마나 작용했는지 재론하는 것은 더 이상 무의미할 정도다.

남은 것은 헌법재판소의 탄핵 심판 뿐인데 박근혜 대통령은 자기가 가진 거의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작은 법적 이익이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태도를 거듭 보여주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9일 진행될 것으로 알려졌던 특검의 대면조사에 대해서도 비협조적인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특검에 시기와 내용을 비공개로 할 것을 요구했으나 ‘언론플레이’를 하며 일정을 유출했다는 이유다. 본인에 대한 범죄 의혹 수사를 정치적 협상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셈이다.

일부 언론은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 심판에 직접 출석해 ‘최후변론’을 할 가능성을 언급하고 있다. 이는 박근혜 대통령이 최선을 다한 소명을 해보겠다는 의미가 아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사실상 자신을 향한 모든 의혹이 ‘날조’에 가깝고 기성 언론과 정치권이 ‘선동’에 나서고 있다는 인식을 바꾸지 않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마지막 순간에 자신이 직접 나서서, 그간의 모든 검찰과 특검 수사 및 최순실 씨 등에 대한 재판 기록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의혹이 사실이 아니라는 입장을 밝혀야 탄핵 기각의 가능성이 단 1%라도 높아진다는 판단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 측이 박한철 전 헌법재판소장에 이어 이정미 헌법재판소 재판관까지 퇴임한 상황에서 결정을 내려야 이익이라는 이유로 ‘시간 끌기’ 작전에 돌입한 것 역시 마찬가지다. 7명 중 6명이 찬성해야만 탄핵 인용 결정이 가능한 상황을 이 나라의 최고 권력이 스스로 만들고 있는데, 이를 두고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승복해야 한다”는 말만 반복하는 기성체제는 문제 해결의 능력이 없음을 스스로 실토하는 것이다.

국민의 대표로 국회에 간 정치권조차 문제 해결을 못하면 국민의 입장에선 당연히 체제를 뒤엎자는 생각을 하게 될 수밖에 없다. 촛불 시민들에게 직접 호소하자는 야권 일각의 대응은 바로 그 점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촛불 시민들이 직접 나서는 정국이 만들어지더라도 미국이나 유럽의 예를 볼 때 그 결과가 최종적으로 바람직할 것이라는 기대를 하기는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의 체제가 촛불 시민의 압력에 의해서라도 작동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줘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기성 체제의 기득권 중 하나인 언론조차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이러니 ‘혁명’을 얘기하지 않을 재간이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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