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 측의 거듭되는 ‘지연전술’이 결국 헌법재판소의 탄핵 심판을 정파적 논란의 대상으로 전락시키고 있다. 이러한 행보는 단기적으로 보수세력에 정파적 이득을 안길 것으로 예상되지만, 장기적으로는 한국 정치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길 것으로 전망된다.

박한철 헌법재판소장은 임기 마지막 날인 31일 퇴임사를 통해 “대통령 직무정지 상태가 벌써 두 달 가까이 이어지고 있는 상황의 중대성에 비춰 조속히 이에 대한 결론을 내려야 한다”면서 “세계의 정치와 경제질서의 격변 속에서 대통령의 직무정지 상태가 벌써 두 달 가까이 이어지고 있는 상황의 중대성에 비춰 조속히 이에 대한 결론을 내려야 한다는 점은 모든 국민이 공감하고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박헌철 헌법재판소장은 지난 25일에도 이정미 재판관의 임기만료일인 3월 13일 전에 탄핵심판의 결론이 내려져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이는 박한철 헌법재판소장에 이어 이정미 재판관의 임기까지 만료될 경우 탄핵심판 인용 또는 기각 결정의 절차적 정당성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우려를 표현한 것으로 해석된다. 헌법재판소의 심판 절차는 정족수를 7인으로 하는데, 사실상 두 사람의 후임을 임명하는데 어려움을 겪어 간신히 정족수를 충족하는 형태로 결정이 내려질 가능성을 고려한 발언이다.

박한철 헌법재판소장이 31일 오전 서울 종로구 재동 헌법재판소에서 열린 퇴임식에서 퇴임사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박한철 헌법재판소장이 두 차례에 걸쳐 빠른 결정을 촉구한 것은 박근혜 대통령 측이 사실상 노골적인 지연작전을 벌이는 데에 따른 것이다. 언론 보도에 의하면 박근혜 대통령 대리인단은 지난 27일 최순실 씨가 만든 회사인 더블루K의 금융거래정보를 제공해달라는 신청서를 헌법재판소에 접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최순실 씨는 탄핵 심판에서 더블루K의 자금이 자신의 계좌 등으로 이동한 바가 없다고 주장한 바 있다.

대통령 대리인단의 경우 최순실 씨가 더블루K를 통해 대기업의 자금 등을 직접 수수한 바가 없다는 사실을 증명해 박근혜 대통령의 뇌물수수 혐의도 비켜가려는 전략을 짠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개인의 금융거래정보를 확인하는 데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수 있기 때문에, 이 역시 탄핵 심판의 결론이 내려지는 것에 대한 ‘지연전술’이라는 지적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대통령 대리인단은 이 외에도 ‘전원 사임’을 거론하는 것으로 탄핵심판에 또 다른 압박을 가하고 있다. 대통령 대리인단은 지난 25일 박한철 헌법재판소장이 3월 13일 이전 결론을 촉구한 것에 대해 탄핵 심판에 임하는 헌법재판소의 태도가 공정하지 않다는 취지의 비판을 내놓으며 ‘중대결심’을 언급했다. 헌법재판소법은 ‘각종 심판절차에서 당사자인 사인(私人)은 변호사를 대리인으로 선임하지 아니하면 심판청구를 하거나 심판 수행을 하지 못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법조계는 이를 ‘변호사 강제주의’가 적용된 조항으로 본다. 즉, 이 규정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대통령 대리인단이 전원 사임하는 경우 탄핵 심판 절차가 사실상 멈춰버릴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새로운 대리인단을 선임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릴 수 있고, 선임된 이후에도 재판기록을 검토하는데 또 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이다. 결국 어떻게 보면 박한철 헌법재판소장의 ‘신속 결론’ 방침에 대통령 대리인단이 ‘물리적 저지’에 돌입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대통령 대리인단은 자신들의 행위를 ‘지연전략’으로 보는 관점을 부정하고 있다. 박한철 헌법재판소장의 후임을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가 지명하고, 이정미 재판관의 후임을 대법원장이 지명하는 일반적 절차를 거치는 상황을 전제하면 굳이 3월 13일 이전에 탄핵 심판의 결론을 내야 할 이유도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3월 13일 이전 결론을 주장하는 것은 박근혜 대통령의 법률적 방어권을 침해하는 것이라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그러나 박한철 헌법재판소장의 후임을 임명하기 위해서는 국회 동의 절차를 거쳐야 하는데다 황교안 총리가 임명권을 행사할 수 있느냐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오히려 대통령 대리인단의 주장에 정파적 판단이 작용했다는 의구심을 거둘 수가 없다. 새누리당 소속 의원들이 비슷한 견해를 내놓고 있는 것도 이런 맥락이다.

새누리당 정우택 원내대표는 31일 “박한철 소장이 자신의 권한대행이 퇴임하는 3월 13일 이전에 최종 결과를 내야 하는 것처럼 말한 것은 자칫 졸속 심의와 공정성 문제 등 오해를 불러올 수 있어 부적절했다”면서 “모든 국민이 헌재가 대통령 탄핵 심판을 언제 어떻게 할 것인가를 주시하고 있으며, 대한민국 앞날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는 점에서 사심 없이 헌법적 양심에 따라 최선의 결과를 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새누리당 나경원 의원은 29일 “여야는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에게 박한철 헌법재판소장 후임의 지명, 임명권과 이정미 재판관 후임의 임명권을 인정해 주어 신임 재판관들의 임명절차를 진행하는 합의를 이뤄야한다”면서 “이정미 재판관 퇴임 전에 결론을 내리지 못하는 상황은 상상만 해도 혼란스럽다”고 주장했다. 사실상 박한철 헌법재판소장 주장의 논거를 가지고 대통령 대리인단의 논리를 반복한 것이다. 새누리당 인명진 비상대책위원장은 황교안 총리가 새누리당 소속의 대선후보가 돼야 한다는 취지의 주장을 연일 내놓고 있다.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가 31일 정부 서울청사에서 열린 국무회의에 유일호 경제부총리, 이준식 사회부총리 등 국무위원들과 함께 참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의 이런 태도는 혼란을 부추기며 헌법과 헌법재판소의 존재를 희화화하고 있다. 탄핵을 둘러싼 양대 세력의 정면 충돌은 이 결과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헌정유린에 항의하며 한 스님이 분신을 감행한 사태에 이어 박근혜 대통령 탄핵에 반대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는 극단적인 일이 일어났다. 양측의 대립이 격화되면 대선을 둘러싼 정치적 구도에서 중도층을 기반으로 한 정치세력보다는 강경보수를 대표하는 것처럼 보이는 황교안 총리의 정치적 위상 확대가 두드러질 수밖에 없다.

결국 누군가 뒤에서 ‘기획’을 하는 모양새까지는 아닐지 몰라도 박근혜 대통령의 ‘지연전술’이 강경보수세력의 정치적 ‘봉기’와 결집을 유도하는 효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이에 앞서 ‘정규재TV’와의 인터뷰에서 탄핵 국면 자체가 특정 세력의 음모에 의해 조성된 것이라는 주장을 했는데, 이러한 인식이 앞의 상황과 같은 맥락에 놓이면 강경보수세력의 이후 행로를 장담할 수 없게 된다.

박근혜 대통령의 반복된 선택이 기성 정치와 제도, 매스미디어 전체를 믿지 못하는 흐름이 정치세력화 되는 결과가 될 수도 있는 셈이다. 미국에서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탄생 이후 ‘대안적 사실(alternative facts)’이라는 신조어가 유행하고 있다. 기성 언론이 ‘사실(fact)’를 전하지 않으니 극우세력이 직접 ‘대안적 사실’ 제시를 통해 바로잡겠다는 얘기다. 물론 여기서 ‘대안적 사실’은 극우세력의 입맛에 맞춰 재가공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신조어의 등장 자체가 도널드 트럼프와 그 지지자들을 핍박받는 피해자로 둔갑할 수 있게 해주고 있다. 이를 위의 사실들과 함께 보면 결국 한국에서도 정확히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 셈이다. 서구와 같은 형식의 극우정치 등장은 이미 현실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