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요? 박근혜 대통령 말을 들으면서 같은 한국말인데도 알아듣기 어려워 곤욕을 치렀었는데,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의 말도 해석이 필요할 듯 합니다. 정치교체 부르짖는 것도 그렇고, 위안부협상 찬양한 것도 그렇고, 의전 좋아하는 것도 그렇고, 수첩이 있어야만 언행이 가능한 것도 그렇고, 갈수록 반 전 총장(이하 반기문)과 박 대통령이 겹치는 점이 많아 보이네요.

내친 김에, "따뜻한 찬물"(노회찬), "뜨거운 얼음"(손학규), "마른 뚱보"(이승환) 등으로 희화화 되며 많은 이들에게 웃음을 던져주고 있는 '진보적 보수주의자'라는 미스테리어스하고 애애모호한 낱말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하죠. 어떤 사람이어야 여기에 해당되는 걸까요?

물론 "진보와 보수를 다 아우르겠다"는 반기문의 야무진 포부를 모르는 바 아닙니다. 대선에 뜻을 두었으니 이쪽 저쪽 다 먹고 싶은 욕심이 생기기도 하겠죠. 그렇다 해도 지켜야 할 선이 있는 것 아닙니까?

29일자 MBN 뉴스특보 캡쳐

지난 25일 반기문이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올린 “페친이 묻고 반기문이 답하다”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진보적 보수주의’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이렇게 공개했더군요.

"저는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대한민국의 굳건한 안보를 지킨다’, 이런 면에선 분명히 누구보다 더 보수주의자입니다."

"약하고 힘 없는, 소리를 낼 수 없는 사람들의 대변자가 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하고 그들의 인간의 존엄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노력을 했는데 이런 면에서는 진보적인 생각을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렇게 따지면 이번 대선에 나온 사람들 가운데 '진보적 보수주의자'가 아닌 사람들이 어디 있습니까? 대선주자들 가운데 시장경제를 부정하고 굳건한 안보를 약속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진보적'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있는 문재인, 이재명, 안희정도 같은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반기문 말대로라면, 이들도 '보수주의자'라고 불러야 겠군요.

나아가 대선주자들 가운데 "약하고 힘없는, 소리를 낼 수 없는 사람들의 대변자가 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이겠다"는 말을 입에 담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보수적'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는 유승민, 남경필, 김문수 등도 같은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반기문 말대로라면, 이들도 '진보주의자'라고 불러야 겠군요.

재밌는 건, 앞서 거론한 인물들 가운데 시장경제와 안보, 그리고 인권과 소외계층 케어를 대선공약에 담지 않은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이 땅에서 정치하는 사람치고 이 두 가지를 어떻게 소홀히 할 수 있겠습니까? 진보적 스탠스를 취하고 있다고 하여 어찌 안보의 중요성을 간과할 것이며, 보수적 스탠스를 취하고 있다고 하여 어찌 양극화의 아픔과 사회의 안전망을 모른 체 하겠습니까?

그럴진대 반기문 말대로라면, 이들 모두 '진보적 보수주의자'라고 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반기문 자신만 콕 집어 그런 타이틀을 붙일 이유와 명분이 없다는 말이지요. 그 전에 고작 저런 이유들로 보수와 진보를 가르는 철학의 빈곤도 지적받아야 할 테고요.

글을 마치기 전에, 한 마디. 반기문은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다 한 마리도 못 잡는다"는 옛말을 떠올릴 필요가 있습니다. 대선 완주 가능성 자체를 의심받고 있는 반기문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진보와 보수를 동시에 거머쥐겠다는 양수겸장의 비법이 아니라, 진보나 보수 어느 한쪽에라도 확실히 발을 붙이고 끝까지 살아남는 것이 시급하지 않을까요? 진보와 보수를 기웃거리다가 양쪽에서 동시에 버림받는 박쥐꼴이 될까봐 심히 '우려'돼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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