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사임당 빛의 일기>(이하 <사임당>)의 시작은 호기롭다. 조선이 유럽과 교역조차 하지 않았던 1551년, 조선인이 어떻게 머나먼 이태리까지 가게 되었지 하는 의문을 품게 하는 오프닝은 단숨에 21세기로 넘어와 교수가 되기 위해 지도교수의 가사 도우미 노릇도 마다하지 않는 서지윤(이영애 분)의 이야기와 연결된다.

대학교 고고미술사 시간강사를 전전하고 있지만 유능한 펀드매니저 남편을 둔 덕분에 유복하게 생활하고 있던 지윤은 남편의 사업실패로 하루아침에 망하게 된다. 설상가상, 안견의 ‘금강산도’의 진품 여부를 두고 지도교수 민정학(최종환 분)에게 밉보여 시간강사 자리까지 잃게 된다. 모든 것을 잃고 벼랑 끝에 몰리게 된 지윤은 우연히 신사임당이 썼을 것으로 추정되는 일기를 발견하고 단서를 찾아가던 중, 시간 여행을 떠나게 된다.

SBS 수목드라마 <사임당 빛의 일기>

21세기 미술사학자가 신사임당의 일기를 발견하고 신사임당이 살던 16세기 중반으로 타임슬립한다는 이야기로 알려진 <사임당>의 내러티브는 예상 외로 촘촘했고 풍성했다. 사실 <사임당>은 1회만 보아도 결말이 예측되는 판타지 드라마이다.

신사임당의 후생으로 그려지는 서지윤은 단 1회 만에 다니던 직장과 살던 집을 모두 잃고 깊은 절망감에 빠진다. 하지만 위기도 잠시, 지윤은 이 모든 난관에서 자신을 구해줄 구세주, 사임당의 일기와 지윤과 꼭 닮은 사임당의 초상화를 손에 얻게 된다. 지윤이 발견한 사임당의 일기는 나락에 빠진 지윤을 구하고 그녀를 진짜 영웅으로 만들어 줄 것이다. 대신, 지윤은 자신의 전생인 사임당으로 타임슬립을 해야만 한다. 그곳에서 안견의 금강산도가 진짜가 아니라는 단서만 찾아내고 홀연히 시간여행을 끝냈으면 좋겠지만, 사임당을 열렬히 사랑했던 이겸(송승헌 분)과의 애틋한 로맨스를 피해갈 수 없어 보인다.

SBS 수목드라마 <사임당 빛의 일기>

드라마 <사임당>의 진짜 이야기는 21세기의 여성 지윤이 겪는 곤경이 아닌, 16세기 중반을 살았던 신사임당과 이겸의 이뤄질 수 없는 사랑에서 시작된다. 어린 시절 이겸과 사임당이 나눴던 풋풋한 로맨스가 잠깐 소개되지만, 지윤이 경험한 신사임당의 세계에서 사임당은 이미 자식을 셋이나 둔 유부녀였고, 이겸은 20년이 지나도 사임당을 잊지 못해 한량처럼 지내는 몰락한 왕족으로 비춰진다.

<사임당>은 지윤의 타임슬립에 당위성을 부여하기 위해, 지윤이 안견의 금강산도 위작 논란으로 고통 받고 있고, 억울하게 빼앗긴 자신의 자리를 되찾기 위해 사임당과 이겸과의 과거를 적극적으로 해부하는 절박함을 얹힌다. 신사임당이 살았던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사임당과 이겸 사이에서 있었던 500여 년 전 미스터리를 추적하는 설정은 사임당과 이겸의 사랑을 흥미롭게 그리고자 하는 일종의 양념이다.

그런데 아직 2회만 방영했을 뿐이지만, 이미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의 완성형을 찍었던 사임당과 이겸의 로맨스는 그리 흥미진진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오히려 사임당의 숨겨진 로맨스를 그리는가 싶었던 드라마에서 예상치 못했던 재미를 안겨준 것은, 지윤을 곤경에 빠지게 한 안견의 금강산도 위작 논란이다.

SBS 수목드라마 <사임당 빛의 일기>

아직까지도 미술계에서 많은 말들이 나오고 있는 천경자의 ‘미인도’ 위작 논란을 겨냥했던 것일까. 드라마 <사임당>에 등장하는 안견의 ‘금강산도’는 진짜가 아닌 가짜다. 하지만 이 위작을 소장하고 있는 재벌과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가고 싶은 민정학의 이해관계와 맞물려, 가짜 금강산도는 ‘진짜’ 금강산도로 둔갑된다. 그러나 학자로서 양심을 숨길 수 없었던 지윤의 말실수로 ‘금강산도’ 위작 논란은 도마 위에 오르게 되고, 지도교수 민정학을 곤란하게 만들었다는 죄명으로 지윤은 시간강사 자리까지 내놔야했다. 교수가 되기 위해 민정학의 철저한 ‘을’로 살았지만, 하루아침에 버림받은 지윤은 우연히 얻은 사임당 일기를 토대로 학자로서 할 수 있는 가장 우아한 복수를 단행한다.

허나 지윤이 반격을 도모할 수 있었던 것은 정말 우연히 얻게 된 사임당의 일기 덕분이었다. 어디에 홀린 듯 찾아간 이탈리아 토스카나에 위치한 고택에서 신비로운 일을 경험하고 자신과 닮은 사임당 초상화를 발견한 지윤을 두고, 고택의 관리인은 운명의 신호라고 호들갑을 떤다. 신사임당의 후생으로 태어나 최악의 삶의 위기에 몰렸을 때 전생을 확인하고 잃어버린 기억의 단서를 찾아 나서는 지윤의 삶 또한 필연적인 운명이다. 그런데 이 운명론에 기반한 <사임당>의 스토리에서 이영애를 아시아 최고 스타 반열에 오르게 했던 MBC <대장금>이 자연스럽게 떠올려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대장금의 사임당 버전이 아닌, 온전한 작품 <사임당>을 보여주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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