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구설수에 휘말리며 맥을 못추고 있다. 입국 일주일이 지났는데도 유효한 정치적 메시지를 내놓지 못한 채 방황하고 있다. 반기문 전 총장을 보수정치의 구세주처럼 떠받들던 정치권은 이제 반기문 전 총장이 언제 낙마하느냐를 두고 내기라도 할 듯한 분위기로 돌변하고 있다.

정치인으로서 반기문 전 총장의 비극적 최후를 예견하는 사람은 한 두명이 아니다. 과거 ‘친이계’로 분류됐던 정두언 전 의원은 19일 TBS라디오 등을 통해 “이대로 가면 선거를 치르기 힘들 것”이라면서 반기문 전 총장이 이명박 전 대통령을 만나기로 한 것에 대해 비판했다. “제2의 고건이 될 수도 있다”는 발언도 했다. 고건 전 국무총리는 참여정부 시기 유력한 대권주자로 꼽혔으나 대선구도가 본격적으로 잡히기 시작하면서 지지율이 급락해 결국 중도 포기했다.

국민의당 박지원 대표도 이날 CPBC 가톨릭평화방송 라디오 인터뷰에서 반기문 전 총장이 대권레이스를 완주할 가능성에 대해 “이런 상태로 지속된다고 하면 상당히 어렵지 않을까”라고 발언했다.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가 지속될 경우 대권행보를 길게 유지할 수 없을 거라는 의미다. 반기문 전 총장이 해프닝성 사건의 연속으로 구설수에 휘말리면서 맥을 못 추고 있는 현실을 보면 이런 진단에도 일리가 있다.

같은 당 안철수 전 공동대표도 18일 “설 지나서 출마 포기할 가능성도 있다고 본다. 아마 유엔사무총장으로서의 명예를 지키고 싶은 마음도 클 것”이라면서 대권구도는 자신과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의 양강구도로 진행될 것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안철수 전 공동대표 뿐만이 아니라 여의도 근방의 인물들은 반기문 전 총장이 사실상 낙마할 경우 누가 문재인 전 대표의 상대로 나설 것인지를 두고 여러 시나리오를 실제 언급하고 있는 상황이다.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이 19일 대전 카이스트를 방문하며 취재진의 위안부 합의 질문에 불만을 표시하고 있다. (연합뉴스)

반기문 전 총장이 시작하자마자 정치적 위기를 안게 된 것은 분명한 사실로 보인다. ‘퇴주잔 사건’ 등 여러 주변적 사건들이 연이어 보도되면서 이미지에 상처를 입었고, 정치교체를 하겠다더니 돈이 없다는 이유로 정당에 입당하려는 사람으로 비춰지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후자의 경우는 정치적으로 상당한 피해를 야기하고 있다. 이 때를 기점으로 해서 기성정치와 반기문 전 총장의 갑을관계가 완전히 역전됐기 때문이다.

노컷뉴스는 19일 반기문 전 총장 측이 바른정당 측 인사들과 입장 조건 등을 놓고 협의해왔다고 보도했다. 일종의 당대당 통합과 같은 원리로 반기문 전 총장 측이 ‘지분’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보도에 대해 바른정당의 창당준비위원장을 맡고 있는 정병국 의원은 입당 조건 등에 대해 구체적인 협의를 한 바 없고, 반기문 전 총장이 입당을 하겠다면 환영하지만 ‘조건부 입당’은 있을 수 없다는 취지로 발언했다.

바른정당 측의 이러한 자신감은 반기문 전 총장이 현실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정당이 이들 밖에 남지 않았다는 판단에 의한 것으로 추측된다. 반기문 전 총장 측이 새누리당 입당을 부정적으로 보고있는 만큼 입당 대상이 될 수 있는 정당은 국민의당과 바른정당 뿐인데, 그나마 국민의당은 최근 반기문 전 총장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반복 피력하고 있다는 것이다.

반기문 전 총장은 금전적 고충 때문에 정당을 선택해야 한다고 토로했는데, ‘금전적 고충’이란 새롭게 정치자금 후원 경로를 만들어 내지 않으면 해소되기 어려운, 어떤 실존적 조건에 해당하는 것이다. 즉, 반기문 전 총장이 대권레이스를 계속하기 위해서는 바른정당에 입당해 유승민 의원과 남경필 경기도지사에 의해 이미 형성돼있는 기득권의 존재를 감수하고 경선에 나서는 선택지 밖에 남지 않게 된 것이다.

이건 애초의 ‘그림’과는 완전히 다른 상황이다. 반기문 전 총장의 금의환향과 함께 ‘정치교체’가 선언됐기 때문에, 일관성을 가지려면 기성정치와 완전히 선을 긋는 행보가 이어졌어야 한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에 반기문 전 총장의 정치인으로서의 ‘신선도’는 급격히 떨어지고 있다. 이런 식으로 ‘기회주의자’라는 평가를 받게 되는 순간 대통령직을 차지하는 건 꿈속에서나 가능한 일이 돼버린다.

반기문 전 총장이 언론을 대하는 태도가 새로운 정치라기보다는 권위주의 시대를 추억하는 ‘아마추어’와 같은 모양이라는 것도 문제다. 반기문 전 총장은 오마이뉴스 등에 소속된 일부 기자가 한국과 일본 간의 위안부 합의에 대한 자신의 평가에 대해 반복 질문하는 것에 대해 상당한 불쾌감을 피력하고 있다. 반기문 전 총장은 18일 일부 기자들을 두고 “내가 마치 역사의 무슨 잘못을 한 것처럼… 나쁜 놈들이다”라고 발언한 데 이어 19일에도 위안부 문제에 대해 질문하는 기자들에 예민한 반응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정치인, 특히 대권을 잡겠다는 사람이 이 정도 수준에서 언론의 검증을 이런 방식으로 회피하는 것은 매우 곤란하다. 기자가 질문을 하면 정치인은 대답을 하면 되고, 이 과정 자체가 해명 기회가 된다는 것은 상식에 속하는 문제다. 이를 자신을 향한 어떤 도전(?)으로 받아들이고 “나쁜 놈들”이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대권주자로서 준비가 된 상태인지, 제대로 된 언론관을 갖추고 있는 것인지 자질을 의심케 한다.

일상적 대응이 안 되는 이유는 반기문 전 총장의 대선캠프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는 지적을 할 수 있다. 한국일보는 19일 반기문 전 총장 대선캠프의 핵심인사들이 견해 차이로 분열 양상을 보이고 있다고 보도했다. 정당에 몸을 담을 것인지, 그렇지 않고 ‘빅텐트’를 추진할 것인지 등을 두고 갈등을 빚은 끝에 이명박 정권 출신 인사들의 이탈조짐이 있다는 것이다. 한국일보의 보도에 “우리(친이계ㆍ언론인 출신)는 외곽에서 따로 전략을 짜서 반 전 총장에게 보고하기로 했다”는 친이계 인사의 발언이 나올 정도다.

이 기사에는 반기문 전 총장의 대선캠프는 외교관 출신과 이명박 정권 출신이라는 양대 축으로 구성돼있는데, 양자 간의 갈등 외에도 외교관 출신들끼리 갈등을 빚고 있다는 점도 언급돼있다. 이에 대해 한국일보는 “같은 외교관 출신이자 외무고시 12회 동기로 캠프 핵심인 김숙·오준 전 유엔 대사의 사이도 벌어진 것으로 전해졌다”, “최근 반 전 총장이 김 전 대사에게 강한 불신을 표해 내부 권력의 축이 오 전 대사 쪽으로 이동했다는 얘기도 나돈다”고 보도하고 있다.

물론 이런 난맥상에도 불구 반기문 전 총장이 버티면 마지막에 가서는 양강구도가 될 수밖에 없다는 진단도 있다. 19일 MBC라디오에 출연한 정치평론가 고성국 씨는 “두 달 후 정도면 혼전 박빙으로 갈 것”이라고 주장했다. 야권의 유력 대권주자인 문재인 전 대표의 중도적 확장성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보수진영이 전열을 재정비하고 반기문 전 총장 특유의 ‘스킨십’이 긍정적 영향력을 발휘할 거라는 취지다. 그러나 그것도 반기문 전 총장이 그때까지 버틸 수 있을 때의 얘기다. 기자와 언론을 탓하는 게 아니라 정치적 반환점을 스스로 만들지 못하면 늪을 빠져나갈 수 없다는 걸 반기문 전 총장이 먼저 깨달을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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