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반성과 사회 비판

고전이 사람들에게 꾸준히 읽히는 이유는 뭘까? 책장에 꽂혀있는 '논어'를 보고서 뜬금없이 든 생각이다. 아무리 내 전공이 동양철학이라고 하더라도 급박하게 돌아가는 현실 사회에서 이 책이 내 책장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좀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2,500여 년 전 중국에 살았던 사람의 언행록이 경제적 신자유주의와 정치적 독재가 판치는 이 사회를 살아가는 먹물에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물론 어떤 이는 이 책이 시공을 초월하는 진리를 담고 있다고 하여 여전히 책 속의 말을 금과옥조로 여기기도 한다. 나는 시공을 초월하는 진리 따위는 없다고 믿기에 그런 것으로는 이 책이 내 책장에 꽂혀있는 것을 해명할 수는 없다.

고전. 사람들이 그것을 꾸준히 읽는 이유는 아마도 새로움 때문인 것 같다. 옛날 책에서 새로움을 찾는다는 것은 모순된 이야기처럼 들릴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의 새로움은 읽을 때마다 새로운 영감을 준다는 의미다. 그리고 읽을 때마다 새롭다는 것은 책이 새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읽는 내 상황이 변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즉 고전은 읽는 이의 상황에 따라 다른 느낌과 영감을 준다. 그것은 읽는 이가 그것을 읽음으로써 현실의 자신을 고전에 비춰보기에 가능하다. 고전이란 나 자신을 비춰보는 거울인 것이다. 즉 고전은 내가 나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도록, 반성할 수 있도록 한다. 그리고 반성이란 내가 나 자신을 비판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반성의 사회적 확장이 바로 사회 비판이다.

화해와 용서, 그리고 정치보복

▲ 이명박 대통령과 부인 김윤옥씨가 23일 국회 앞마당에서 열린 고 김대중 전 대통령 영결식에서 헌화, 분향한 뒤 걸어 나오고 있다. ⓒ 인터넷사진공동취재단 남소연
지난 8월18일 김대중 전 대통령이 우리 곁을 떠났다. 현대사의 질곡을 온 몸으로 겪다가 대통령이 되고 노벨평화상까지 받아 어쩌면 ‘해피엔딩’으로 마감할 수 있었던 그의 정치 인생은 현 정권의 등장으로 인해서 해피하게 마감하지 못했다. 그런데 8월23일 장례식 당일 부인 이희호 여사는 김 전 대통령의 유지 가운데 하나로 ‘화해와 용서’를 꼽았다. 화해와 용서. 정말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들었던 이야기다. 이와 반대되는 말로 등장하는 것은 아마도 ‘정치보복’일 것이다. 우리는 화해와 용서 이전에 이 정치보복에 대해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전직 대통령과 그의 가족에게 비리가 있었을 때, 그들을 법으로 심판하는 것이 정치보복인가? 그와는 달리, 법을 수호하고 집행해야 할 검찰이 무죄추정의 원리를 어겨가면서 전직 대통령과 가족들의 확증되지 않은 혐의를 언론에 공표하여 여론몰이를 하는 것이 정치보복인가? 이 두 경우가 같다고 할 수 있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우리는 교육을 통해 법 앞에서의 평등을 배웠다. 전직 대통령도 죄가 있으면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후자의 사례는 검찰이 원칙을 어겼고, 그 의도는 누가 봐도 뻔하기 때문에 정치보복임에 분명하다. 만약 정말로 죄가 있다면 그 당사자가 자살했던 말건 그 주변 인물들에 대한 수사를 진행해서 법의 심판을 받도록 해야 한다. 그것이 ‘법치주의’에 맞는 것 아닌가?

정치보복이 아닌 정당한 심판, 비판이 가해진 연후에야 그 당사자와 화해할 것인지, 그 당사자를 용서할 것인지를 말할 수 있다. 특히 용서(容恕)에서의 ‘서’는 나 자신으로부터 남을 미뤄보는 것, 다시 말해서 나를 그 사람의 입장에 세워보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그 사람의 입장에 섰을 때 나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겠다거나 그렇게 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을 때야, 비로소 그를 용납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그가 행한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나야 하고, 그 사람의 자기반성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용서가 있어야 진정한 화해가 가능하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 사회에서 화해와 용서는 가능한가? 올해 1월20일 용산에서는 무모한 경찰 진압으로 생존권 보장을 외치던 철거민 5명과 진압 경찰 1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것은 분명히 공권력의 과도한 집행으로 빚어진 참사다. 6명의 무고한 인명이 희생되었는데도 현 정부의 수장은 제대로 된 사과 한 마디 없다. 더구나 검찰은 수사 기록 약 10,000쪽 가운데 약 3,000쪽을 아직도 공개하지 않고 있다. 무엇이 국민의 공복인 이들을 이처럼 무뢰하게 만들었을까? 만약 정권이 바뀌더라도 이들의 행위에 대해서 화해와 용서의 정신을 발휘해야 하나? 정치보복을 해서는 안 되므로?

사회 비판과 그에 따른 처분

사회 비판은 비판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비판에 상응하는 처분이 있어야 한다. 예컨대 독립운동을 한 사람은 포상하고, 친일행위를 한 사람은 처벌해야 한다. 이러한 처분이 없는 비판은 공허하다.

하지만 우리 현대사에서는 제대로 된 비판과 처분이 이뤄지지 않았다. 그 연원은 이승만 정권에서 찾을 수 있다. 극단적 반공주의자 이승만은 공산주의자만 아니면 누구도 쓸 용의가 있었다. 그래서 해방 이후의 행정상의 공백을 친일파들로 채운다. ‘반민특위’처럼 합법적인 기구조차도 불법적으로 해체하면서까지 친일파들을 보호하고 그들을 기용했다. 오늘 공산주의자들을 잡아 족치는 ‘그 경찰’은 어제 독립운동가들을 잡아 족치던 ‘그 경찰’이었다. 대한민국 건국 초기부터 우리 사회는 비판을 용납하지 않았고, 친일파들로 하여금 자신의 과오를 반성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당시에 그들의 행위에 대한 처분이 이뤄지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그 이후로도 그들의 행위에 대한 처분은 이뤄지지 않았다. 심지어 그들의 과거 행적에 대한 사실을 공표하려는 것까지 막혀있는 상태다. 그것을 막는 것은 현재 우리 사회의 기득권층을 형성하고 있는 그들의 후손임은 말할 것도 없고.

뿐만 아니라 과거의 군사독재정권에 빌붙어 국민들을 탄압하던 사람들이 지금은 고위층이 되어 현 정부에 충성하고 있다. 군사독재정권과 현 정권, 그 사이의 10년 동안 ‘민주정부’가 들어섰을 때에도 이들은 안전했다. 정치보복을 해서는 안 되니까. 우리는 화해와 용서의 정신을 중시하니까 말이다.

그런데 자신의 영달을 위해서 이 땅의 민중을 팔아먹고 억압한 이들을 어떻게 용서하란 말인가. 더구나 그들은 자기반성도, 사과도 하지 않으며, 심지어 사실을 왜곡하고 진실을 말하려는 자들의 입을 막으려 하는데 말이다. 용서를 말하는 자는 생각해보라. 당신이 저들의 입장에 처하면 그처럼 행동할 것인가? 만약 그렇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그들을 용서하라. 하지만 나는, 그리고 우리 사회 성원 대부분은 그들을 용서하지 못한다. 용서해서도 안 된다. 그러면 그들과 그들의 후손은 여전히 나와 우리의 후손을 팔아먹고 억압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조건적 화해와 용서는 그들에게서 반성의 기회를 빼앗는 행위이다.

한마디만 더.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2009년 1월 16일 일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역사상 모든 독재자들은 자기만은 잘 대비해서 전철을 밟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결국 전철을 밟거나 역사의 가혹한 심판을 받는다.”

그가 이런 글을 누구를 향해서 썼는지는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그런데 독재자가 자신을 독재자라고 생각할까? 그가 자신이 독재자임을 안다는 것은 자기반성을 한다는 것인데, 자기반성을 하는 사람이 그런 독재 행위를 할 수 있을까? 아마도 그는 자신이 독재자라는 것을 모를 것이다. 그렇다면 가르쳐줘야 한다. 그리고 만약 독재를 계속한다면 사회적 비판과 처분을 받게 될 것이라는 가르쳐줘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진실은 묻힐 것이며 진정한 용서와 화해는 이루어질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말해야 하며 투쟁해야 한다.

“당신은 독재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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