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했던 대로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은 무색무취 정치의 전형적인 메시지 관리를 선보일 모양이다. ‘중도’, ‘정치교체’ 등의 메시지를 내세우고 있는 것을 보면 그렇다. 그러나 이런 식의 정치가 올해 대선에도 효과를 발휘할 것인지 의문이다. 오히려 ‘붕괴’의 길로 가는 가장 쉬운 방식이 될 가능성이 커 보인다.

반기문 전 사무총장 측 인사로 알려진 오준 전 유엔대사는 12일 MBC라디오와의 전화연결에서 반기문 전 사무총장의 정치적 지향에 대해 “유엔이 다루고 있는 경제사회 이슈들은 국내 정치적인 관점에서 볼 때는 중도쯤 된다”면서 “굳이 국내 정치적 스펙트럼에서 본다면 보수는 아닌 것 같다”고 발언했다. 과거 새누리당 정진석 전 원내대표가 “(반기문 전 사무총장이) 병든 보수의 메시아는 되지 않을 것”이라고 발언한 바를 상기하면, 오준 전 대사의 이 발언은 단순히 유엔의 활동 내용에 대한 설명을 넘어서는, 향후 정치적 일정을 염두에 둔 것으로 읽힌다.

반기문 전 사무총장의 국내 정치 행보에 대해서는 그간 정계개편과 연동된 다양한 시나리오가 제기돼 왔다. 오준 전 대사의 주장과는 달리 이 시나리오들은 대개 보수정치세력의 재편성과 더 밀접한 관계를 가진 것으로 이해돼왔다. 따라서 오준 전 대사의 발언을 고려하면 가장 실현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 것은 반기문 전 총장이 당분간 독립적 세력으로서 관망을 유지하는 것이다.

이런 전망에는 두 가지 차원의 근거가 작용한다. 첫째는 더불어민주당을 제외한 기성 정치세력이 ‘승리’를 보장할만한 지지를 획득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새누리당은 서청원, 최경환 의원 등에 대한 인적청산을 진행하지 못해 상당한 진통을 겪고 있다. 이들의 문제를 지적하며 탈당을 선택한 인사들이 모여있는 바른정당은 새누리당 절반 수준의 지지 밖에 얻지 못하고 있다. 새누리당이나 바른정당 소속의 인사들이 주장하는 대로 반기문 전 총장이 섣불리 이들 세력 내부의 경선에 나서는 건 지나치게 모험적인 선택이다.

따라서 반기문 전 사무총장으로서는 외곽에 머물면서 스스로 몸집을 불려 이후의 정계개편을 주도하는 게 더 나은 시나리오다. 이에 대해서는 새누리당 내의 충청권 및 중도파 의원들이 탈당을 선택하는 시점에 방아쇠가 당겨질 가능성이 크다. 이들을 중심으로 ‘반기문 세력’을 유지하다 개헌 등을 재료로 국민의당 바른정당 및 그 외 제3세력 등을 포괄하는 ‘빅텐트’를 치겠다는 전략이 유력하다.

둘째는 최순실 등에 의한 국정농단 의혹이 사실로 드러나는 이 때에 ‘여권’으로 묶이는 건 더 이상 매력적인 선택지가 아니게 됐다는 점이다. 야권이 반기문 전 총장의 대통령 당선은 정권교체가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는 게 대표적이다.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는 11일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새누리당 또는 제3지대와 손잡고 정치를 한다면 박근혜 정권의 연장”이라고 발언했다. 문재인 전 대표는 지난 8일에도 “반기문 전 사무총장이 대통령에 당선되는 게 정권교체는 아니다”라고 주장한 바 있다.

야권 일각에서는 반기문 캠프의 인적구성이 결국 구태정치의 재림을 보여준다는 평가를 내놓고 있는 상황이다. 더불어민주당은 11일 이에 대해 “김종필 전 총리를 비롯한 충청권 인맥, 임태희, 곽승준, 이동관 등 친MB 인맥, 전직 외교부 공무원 그룹 등이 주축”이라면서 “‘MB의 시즌 투’이며 MB그룹과 JP가 만나는 ‘MJP’연합”이라고 주장했다. 일부 언론 보도를 보면 외교관 출신이 중심이 돼있는 반기문 전 사무총장의 핵심지지 그룹들은 이명박 정부 시절 선거 실무 등을 맡았던 인사들의 정무 능력에 상당한 기대를 걸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한 반기문 전 사무총장 측의 대응은 자신의 당선이 정권교체를 넘어서는 ‘정치교체’라고 주장하는 걸로 보인다. 실제 중앙일보 출신으로 반기문 캠프 측에 몸을 담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이상일 전 의원은 12일 CBS라디오와의 전화연결에서 “반기문 전 사무총장은 정치를 하지 않은 사람이기 때문에 대선에 뛰어들어 정권을 잡는 것은 정권교체이고 정치교체”라고 주장했다.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11일(현지시간) 오후 1시 미국 뉴욕 JFK공항을 출발해 인천국제공항으로 향하는 아시아나항공 비행기를 타고 있다. (연합뉴스)

그러나 이런 메시지로 반기문 전 총장에 대한 야권의 비판을 희석시키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정치교체’라는 주장은 과거 안철수 국민의당 전 공동대표가 내세운 ‘새정치’와 거의 유사한 의미로 느껴진다. 안철수 전 공동대표가 정계 진출 당시 신선한 이미지로 기성 정치권에 냉소적 인식을 갖고 있는 대중들을 상대로 바람몰이에 성공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미 기성 정치권에 상당한 인맥을 갖고 있고 생물학적 연령 역시 70대인 반기문 전 사무총장이 이를 벤치마킹(?)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워보인다.

기성 정치권에 대한 냉소적 규정을 인정하면서 자기 정당성을 쌓는 방식의 레토릭 자체가 바람직한 정치를 만들지 못한다는 것도 문제다. 앞서 언급한 안철수 전 공동대표의 사례를 보면 이 문제가 그대로 드러난다. 11일 법원은 국민의당 총선 홍보 리베이트 의혹과 관련해 김수민 박선숙 의원을 비롯한 주요 피고인들 전원에 1심 무죄를 선고했다. 이 사건은 4·13 총선 이후 안철수 전 공동대표의 대권주자로서 가치를 떨어뜨린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했다. 안철수 전 공동대표와 두 의원은 ‘우병우 기획설’ 등을 제기하며 정치공작에 맞서겠다는 의지를 피력하고 있으나 대권주자로서 지지율 회복이 얼마나 가능할지는 장담할 수 없다.

이런 상황은 모두에게 긍정적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적당한 메시지로 승부를 보려는 정치가 얼마나 허약한 것인지를 보여준다. 안철수 전 공동대표를 비롯한 국민의당 핵심 인사들은 4·13 총선 내내 다른 정치세력을 ‘기성정치’로 규정하고 자신들의 새로운 정치를 내세웠다. 이 과정에서 ‘새로운 정치’의 실제적인 내용이 무엇인지는 규명된 바 없다. 그렇기 때문에 권력이 기획을 했든 어쨌든 ‘새로운 정치’가 더 이상 새롭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순간에 그 정치는 훨씬 더 큰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반기문 전 사무총장도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으로부터 금전을 수수했다거나 친인척 비리 등의 의혹을 받고 있다. ‘중도’니 ‘정치교체’ 등의 내용없는 표현을 내세우는 것으로 구체적 정치행위를 대신하려는 시도가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이런 의혹들에 의한 피해는 확대될 것이다. 즉, 정공법이 필요하다. 당장의 정치적 이해득실이 아니라 반기문 전 사무총장이 한국 사회를 어떻게 바꾸겠다는 것인지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어떤 정치인지를 빠른 시일 내에 밝혀야 한다. 이를 무시하고 ‘빅텐트’ 구상과 같은 공학적 아이디어부터 말하는 행태가 계속된다면 그런 정치는 반드시 실패로 이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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