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관통하는 글쓰기는 긴장을 유발한다. 명쾌하고 간명한 글쓰기는 혼란과 좌충우돌의 현장을 수습한다. 가슴 뭉클한 메시지를 담는 글은 더욱 그렇다. 강준만 교수가 11일 경향신문에 기고한 글 ‘절반의 성공’은 명쾌하다. ‘소통’에 대한 강준만 교수의 깊은 안목이 돋보인다. 글은 ‘최장집 교수 특별기고에 대한 나의 의견’이라는 제목으로 게재됐다.

‘문제 해결을 위한 소통’이 아니라 ‘왜 소통이 안 되는지를 발견’해야 한다. 이 글의 핵심이다. 문제점을 발견하면 정치경제적 개혁 의제가 선명하게 떠오르고, 그걸 다뤄 사회진보에 기여할 수 있다고 이끈다. 강준만 교수는 결론으로 최장집 교수의 언론 문제 지적에 공감하며 “소통의 문제를 주로 ‘우리편’을 향해서 제기하자”고 제안하며 마무리 한다.

여기까지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런데 허전하다. 가슴 뭉클한 뭔가가 없다. 왜 그럴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최장집 교수의 엘리트주의적 진단에 대한 또 하나의 엘리트주의적 진단에 머물러서 이다.

경향신문 8월 11일자

강준만 교수는 “비전과 대안보다는 비판과 저항에서 정체성을 찾는 관행”을 진보 언론의 가장 큰 문제로 인식한다. 소통으로 말하자면 이명박 정권 출범 이후보다 노무현 정권 때가 훨씬 심했다고 말한다. 지금과 같은 시기에 이같은 이야기를 간명하게 할 수 있다는 데서 때 묻지 않은 자유주의자의 기개가 느껴지기도 한다.

소통에 관한 또 하나의 엘리주의적 진단

강준만 교수는 최장집 교수가 미리 기고한 글(7월 14일자)에서 이 문제를 거론하지 않았다고 아쉬워한다. 강준만 교수는 “‘소통 문제가 두 개의 세력으로 양극화된 정치의 맥락에서 논의될 때, 그것이 정치발전에 어떤 긍정적 기여를 가져올 지 의문이다’라는 최교수의 생각에 동의한다”면서도 그 ‘의문’을 ‘소통의 문제’와 연결하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여기서 강준만 교수가 생각하는 ‘소통’의 일단이 확인된다. 강준만 교수는 “실제로 ‘인간소통학 개론’은 독선, 오만, 탐욕, 완고, 경박, 자폐성, 피해의식 등과 같은 개인.집단 심리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며 “소통이 심리학만의 영역은 아니다. 소통의 경제학에도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국의 정치학 교과서들은 실제 정치 행위와는 너무도 동떨어져 있다. 한국 정치의 알파이자 오메가는 지대추구(진보.보수를 막론하고 국가 부문의 자원과 영향력에 접근하여 수익을 얻고자 하는 행위)와 이를 실현하기 위한 ‘줄서기.줄세우기’인데, 이런 건 거의 다루지 않고 서양 이론만 화려하게 나열돼 있다.”

강준만 교수는 ‘지대추구’의 완화를 소통의 방향으로 삼는다. 따라서 “시위에 의존해 판을 엎어보려는 단기 모험주의” “우리편의 승자독식을 꿈꾸는 한탕주의”가 문제가 된다. ‘사이버 정치담론의 평균적 수준’을 거론하며 “‘지도자 추종주의’와 더불어 ‘정치의 종교화’ 현상이 매우 심각하다”고 우려하기도 한다.

강준만 교수는 ‘우리편’을 향한 소통이야말로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단초라고 본다. 여기서 의문이 든다. “지대추구와 맞물린 전사회 영역의 정치화.정략화를 완화시킬 수 있는 방안”을 깨달아야 한다는 건데, 이 방안을 위한 ‘우리편’을 향한 소통, 그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안타깝게도 이 글에서는 '소통의 주체’에 대한 이야기가 빠져 있다. ‘우리편’은 누구이며, 실체가 누구인지는 분명히 짚지 않는다. 그래서 이 글만으로 보면 방안을 실현하기 위해 누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를 가늠할 수가 없다.

'우리편'을 향한 소통의 정체는?

글의 맥락을 좇아보면 ‘노무현 정권 시절 친노세력과 이에 비판적이었던 최장집 교수를 비롯한 사람들’ ‘진보적이긴 하지만 남의 말을 듣지 않는 사람들’ ‘주류파를 형성한 많은 개혁.진보적 지식인들’로 표현된다.

강준만 교수가 말하는 주체가 이들이라면 이 ‘방안’ 수준은 추상 수준이 맞지 않다. 결이 다른 문제가 남는다. 지난 시절 잘 못 한 걸 반성하고 보다 대안적인 주체로 거듭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좋은 덕담에 그치고 만다. 최장집 교수가 말한 ‘소통의 엘리트주의, 양극화’ 함정의 약점을 짚었다 하더라도, 이어지는 ‘우리편’ 소통 문제의 ‘경로’에 대해서 언급해야 완성도가 갖춰질 텐데 이걸 구체적으로 다루지 않아서다. 승자독식주의, 초강력 중앙집권주의 등 소통을 가로막는 7가지 문제는 이미 지적했던 바다. 진단에서 이어지는 ‘누가 어떻게’를 풀어놓지 않으니 또하나의 ‘소통의 엘리트주의일 뿐’이라는 지적을 피해가기 난망해 보인다.

이같은 한계는 글의 마지막 부분에서도 확인된다.

“그동안 한국 사회에서의 여론 형성은 주류언론들이 압도적인 영향력과 더불어 이슈를 설정하고, 지식인들이 이 논의에 참여하는 방식이었다. 이 과정에서 이른바 진보언론은 자주 보수언론에 대한 거울이미지로 반대 논리를 제시해왔다. 그러면서 사회의 집단적 의사형성은 냉전반공주의나 정치에 대한 도덕주의적 관점에 의해 좁게 제한된 이데올로기적 틀을 통해 만들어져 왔다. 공론장에서 논의되는 이슈들은 이렇게 정형화된 이념 범주로 분류되어, 언론매체들을 통해 사회화되고 정치화되었다. 사회의 의사형성이 언론과 지식인 엘리트들에 의해 선점되고 좁게 제한된 이데올로기 범위로 한정되는 조건에서, 공공여론이 사회현실을 반영하고 그로부터 발생하는 문제를 이슈화하기는 쉽지 않다. 소통의 문제가 이런 맥락에서 제시될 때, 엘리트주의라는 특징과 아울러 그러한 의사형성과 여론이 사회현실로부터 크게 괴리되었다는 비판을 면하기는 어렵다.” (최장집)

'소통'에 그치지 않는 '연대' 방안 거론해야

최장집 교수의 주류언론에 대한 진단에 강준만 교수가 동의를 표했다. 하지만 최장집 교수의 엘리트주의적 진단을 인정하는 것에 그치고 만다. 말하자면 엘리트주의적 진단에 대한 또하나의 엘리트주의적 진단이다. 최장집 교수는 주류언론의 존재와 집단적 의사형성 과정, 그 구조적인 문제를 들추었을지는 몰라도 공감을 끌어내지는 못했다.

앞서 확인한 대로 강준만 교수는 여기서 “‘우리편’이 달라지면 ‘상대편’도 달라진다”고 방향을 잡는다. 설령 그렇게 된다고 하자. 그렇다면 ‘우리편’은 구체적으로 누군지, 달라질 수 있는 방책과 경로가 무엇인지를 더 이야기해야 한다. ‘정형화된 이념 범주’ ‘좁게 제한된 이데올로기 범위’가 어떻게 극복될 수 있는지에 대한 코멘트를 해야 한다. 주류언론의 재생산 메카니즘과 엘리트주의적 진단을 넘기 위해서는 주류에 제한되지 않는 ‘언론 일반’의 주체 진단, 그리고 '소통'에 그치지 않는 '연대' 방안을 거론해야 한다. 확장하자면 "지대추구와 맞물린 전사회 영역의 정치화.정략화를 완화시킬 수 있는 방안"도 마찬가지다. 결정적으로 이 부분이 비어있다.

때문에 명쾌하고 간명하지만 가슴 뭉클한 글이 되지 못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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