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라는 이니셜이 한국 현대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단순히 유명 정치인을 쓰기 쉽게 표현하려던 언론의 얄팍한 수를 무색하게 만든 절대적 호명이었다. 한 때, 그 이니셜은 체제가 민주주의로 진전할 것을 염원하던 이들을 대변하던 호명이었고, 또 한 때 그 이니셜은 한국 정치사의 왜곡된 굴절과 익숙한 패배를 상징하던 이름이기도 했었다. 끝끝내 그 이니셜이 권력의 정점을 점했을때, 세상은 기뻐서 큰 소리로 울던 사람과 슬퍼서 큰 소리로 웃던 사람으로 정확히 나뉘었었다.

한국 현대사 전체를 관통하던, 가장 빛나던 큰 별 DJ가 지금 그의 인생에서 가장 위대한 숨을 발하고 있다. <미디어스>는 앞으로 몇 차례로 나눠 DJ에 관한 글을 연재한다. 사형수에서 대통령에 오른 그의 인생을 단순히 회고하거나 일방적으로 추앙하기 위해서는 아니다. 아직도 빛나고 있는 그의 삶이 오늘 우리가 맞이하고 있는 현실과 어떤 관계를 갖고 영향을 주고 받았는지를 확인하기 위함이다. 한국사회가 구가하고 있는 대다수의 제도적 절차와 민주주의의 형식들 그리고 모순들은 DJ로부터 발인했던 문제라는 것을 부정하기 어렵다. 그 확인은 '민주주의의 민주화'에 대한 고민이 '민주주의의 박제화'에 맞선 투쟁으로 급락한 척박한 상황을 규명하는 열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김대중이 대통령 되면 북에서 난리가 쳐들어온다더라”

92년 대선 당시 어머님이 해주신 말이다. 평생 경기도를 떠나 산 적 없으신 어머니까지도 김대중을 명백한 ‘빨갱이’로 알고 있을 정도로 당시의 이데올로기 지형은 흉흉했고 악성루머와 흑색선전은 난무했다. 그러나 그는 97년 대선을 통해 보란 듯이 대통령이 됐고, 물론 난리는 쳐들어오지 않았다.

이명박이 대통령 되면 ‘난리가 쳐들어온다’고 이야기한 이들이 있었다. 물론, 소수였기에 의미 있는 목소리를 만들어내지 못했고(라기 보다는 누구도 이런 말들을 듣고 싶어 하지 않았고) 그는 압도적인 차이로 대통령이 됐다. 그래서? 보시는 바와 같다. 나라가 온통 거덜나게 생겼다. 사방이 난리다.

하여 오늘의 주제는 국민의 정부와 이명박 정부의 문화정책 비교다. 왜 하필 문화정책이냐고? 물론, 현 정부 들어 가장 저열하게 인적청산 작업과 지난 정부 흔적 지우기에 나선 분야이기도 하지만, 한국 정부의 문화정책을 본궤도에 올려놓은 게 바로 국민의 정부이기 때문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생사의 갈림길을 오가는 지금, 국민의 정부 문화정책이 추억처럼 떠올랐다고 할까. 미디어법과 저작권법 등 문화라는 이름으로 자행되고 있는 ‘만행’들이 무겁게 가슴을 짓누르기 때문이기도 하다.

팔길이 원칙(Arm’s Length Principle)

▲ 김대중 전 대통령. ⓒ 오마이뉴스 유성호
일반적으로 정책은 정권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한다. 정권의 수준은 권력의 정점에 서 있는 대통령으로 대변된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달변의 웅변가이면서 센스도 뛰어났다. 97년 대선당시 TV 토론에 나왔을 때 HOT 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았던 일이 있었다. 그는 잠시 움찔하는 기색을 보였으나 누군가 순간적으로 귓속말을 넣어주자 환한 표정으로 “춤 잘 추죠~”라고 대답했다. ‘거짓 대답’이었을지는 모르지만, 그의 당시 나이를 생각하면 발군의 감각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순간이었다.

반면, 이명박 대통령의 후보시절 어록을 생각하노라면, ‘관기’ 발언이나 ‘마사지걸’ 발언이 먼저 떠올라 사람을 절망케 한다. 코너에 몰린 임기응변도 아니고 작정하고 내뱉은 말이다. 물론, 농담이나 비유에 대해 과도한 해석을 한다는 의견들이 있다. 그럼 다른 말로 예를 들자. 김대중 전 대통령은 “서생의 문제의식과 상인의 현실감각을 아울러 갖추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돈 없는 사람이 정치하던 시대는 지났다”고 이야기했다. 뭐, 더 하실 말씀이라도?

당신이 문화정책 분야의 문외한이라면, 어디 가서 딱 한마디만 하시라. ‘팔길이 원칙(Arm’s Length Principle)’을 지켜야 한다, 는 한 마디면 문화정책에 대해 모른다고 구박할 이는 없을 것이다. 팔길이 원칙이 뭐냐고? 한 번 쯤 들어본 일이 있을 거다. ‘지원은 하되, 간섭은 않는다’는 말. 일단 지원한 후에는 간섭을 최소화하고 자율성을 확보해 주라는 뜻이다. 영국정부가 1945년 예술평의회를 창설하며 예술을 정치와 관료로부터 거리를 두기 위해 채택한 것이 팔길이 원칙이었다.

선진국 이야기를 늘어놓으려는 게 아니다. 한국에 최초로 이 원칙을 천명한 것이 국민의 정부 시절이었다. 이전까지 문화정책은 정부홍보나 전통문화 보존 정도로만 여겨지던 것에서 문화산업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나섰던 게 문민정부였다. 그 당시 우리가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야 했던 이야기가 저 유명한 ‘쥬라기 공원 영화 한편이 벌어들인 돈이 현대자동차 일 년 수출액보다 많다’는 말이었다. 국민의 정부는 여기서 한발 더 나가 문화예술지원의 원칙을 수립한 것이다. 물론, 그 원칙이 제대로 지켜졌는가에 대한 문제는 논란의 여지가 있으므로 별개로 해야겠다.

문화예산 1% 달성

국민의 정부는 팔길이 원칙 외에도 문화정책과 관련한 새로운 지평을 여럿 열었다. 문화의 세기라는 유행어를 만들어내는 데 크게 일조한 것도 국민의 정부였고, 문화예산 1%를 처음 달성한 것도 국민의 정부 시절이었다. 물론, 여기에서도 체육과 청소년 예산을 제외하면 1%에 미달한다는 주장들이 있었지만 최소한 일정 수준 이상의 문화예산을 확보해야 한다는 것을 정부 차원에서 원칙으로 확립한 때가 국민의 정부 시절이라는 것을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기관운영에 있어서도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다. 올해로 10년을 맞은 영화진흥위원회가 탄생한 것도 국민의 정부 시절이었다. 영화진흥공사가 그때까지 ‘정권의 나팔수’ 역할을 자임하며 체제홍보용 국책영화나 만들고 주먹구구식 지원체제를 가지고 있던데 반해, 영진위는 구체적인 지원 시스템과 한국영화의 자생성을 고민하며 영화판 자체를 바꿔냈다. 영진위가 초기 내홍을 겪으면서도 한국영화의 중심으로 빠르게 안착할 수 있었던 까닭은 실제로 현장을 바꿔낼 수 있는 기획력과 추진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의 개혁 역시 영진위를 모델로 위원회 전환이 국민의 정부 시절부터 논의되기 시작했으며, 실제 전환은 참여정부에 와 이루어졌다.

기관 운영의 새 패러다임

이런 정책 방향은 ‘가장 문화의 본령에 가까운 철학을 세운 정부’라는 평가를 이끌어냈다. 임기 막바지에 내놓았던 <순수예술진흥종합계획수립>은 차기 정부에서 나온 <새예술정책>을 예비하는 정책안으로 평가받기도 했다. 한류 문화정책을 적극적으로 펴기 시작한 것도 국민의 정부 시절이었고, 역사적 이벤트인 남북정상회담을 극적으로 성사시키며 남북문화교류의 양적/질적 확대를 가져온 것도 그때였다.

물론, 문화산업에 편중된 정책기조가 강력하게 비판받기 시작한 것도 국민의 정부 시절이었다. 이 비판은 여전히 현장 문화예술인들의 정서에 강력하게 뿌리박고 있다. 정부가 문화예술의 열매에만 관심이 있고, 정작 뿌리를 튼튼하게 돋우는 일은 도외시한다는 지적이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 출범 1년 반 만에 문화정책 현장의 변화를 생각해보면 매우 새삼스럽게도 이미 10년전 국민의 정부 시절 확립된 원칙이 그리워지기까지 한다. 문화부가 보여준 행보는 ‘지원은 하되 간섭은 않는다’를 딱 뒤집어놓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문화부는 ‘지원은 끊되 간섭은 한다’는 원칙을 세운 것처럼 움직였다. 잃어버린 10년이든, 민주정부 10년이든 적어도 문화정책 분야에서만큼은 자율성이 확대되어 온 시기라고 평가할 여지들이 있었다. 그러나 지난 1년 반 동안 문화정책의 변화는 ‘간섭 없는 지원’에서 ‘지원 없는 간섭’으로 이동해 온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급속하게 뒷걸음질쳐 왔다.

국민의 정부 정책 '딱' 뒤집기

취임하기가 바쁘게 ‘좌파적출론’을 내세운 장관은 김윤수 국립현대미술관장, 김정헌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 황지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장 등을 감사로 몰아붙여 결국 자리에서 쫓아내는 데 성공했다. 억지감사에 사퇴강요 이유도 부당하기 그지없었으나 마음먹고 털어대고 작정하고 때리는 매를 견딜 장사가 없었다. 그에 대한 장관의 자평은 ‘이제 겨우 문제를 해결했다’는 거였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실질적 무력화, 독립영화 진영에 대한 시비, 다원예술 정책의 퇴조, 문화예술단체에 대한 대대적인 감사까지. 문화부 주변은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국립오페라합창단 해체를 결국 끝까지 몰아붙였고, 얼마 전 날치기 쇼로 외화된 미디어법을 주도했으며, 저작권법과 사이버 모욕죄 등을 통해 표현의 자유를 옥죄는 데 앞장섰다. 아, 한국의 그래미상을 만들겠다면서 한국대중음악상 시상식에 대한 지원을 끊어버린 일도 있었다. 무려 시상식 일주일 전에 말이다.

영진위는 1년 반 동안 끊임없이 영화계와 불화를 일으켰다. 문화예술위원회는? 위원들이 예산운영에 간섭할 여지를 차단함으로써 ‘현장예술인들의 논의구조를 통한 지원정책 수립’이라는 취지가 무색해진 채 문예진흥원 시절로 회귀해 버렸다. 분야를 가리지 않는 전방위적 압박과 퇴행에 문화예술인들의 반발이 이어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상황일지도 모른다. 그야말로 ‘문화정책 10년’을 통째로 잃어버릴 위기다.

명목과 실질의 간격이 클수록 표리부동하다는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다. 사실, 일반적인 경향은 실질이 빈약할수록 명목은 더 부풀려지기 마련이다. ‘빈 수레가 요란하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이명박 정부의 문화부가 내어놓은 슬로건은 ‘품격있는 문화국가, 대한민국’이었다. 어떻게, 품격이 좀 느껴지시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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