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1세기 전에 안토니오 그람시는 국가와 자본과 시민사회를 놓고, ‘헤게모니’와 같은 혜안을 던져 충격을 주었다. ‘옥중수고’는 그람시가 감옥에서 할 수 있었던 유일한 현실 개입이었다. 그람시는 자본의 이해관계와 지배적인 자본주의적 질서에 의해 억압당하는 자들의 이해관계 사이의 투쟁을 근본적인 투쟁으로 보았다. 파시즘이 창궐하던 시기, 이탈리아 공산당의 지도자로서 보여준 서구 사회 인식의 출발점이었다.

그람시는 강압과 강제와는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는 국가장치로서의 시민사회에 주목했다. 시민사회에서 일상적으로 행해지는 지배계급의 투쟁을 진지전으로 호명하고, 지배계급이 진지전을 통해 피지배계급의 동의를 얻어낸다는 점을 포착했다. 지배계급은 시민사회의 동의로 인해 단순히 강압과 강제적 지배와 달리 동의와 동조를 수반하는 지적.도덕적 지도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는데, 그람시는 여기서 지적.도덕적 지도력을 ‘헤게모니’라고 명명했다. 그람시는 또한 혁명적 정당들이 투쟁을 연계하고, 터득한 교훈을 일반화하고, 마침내 사회를 변혁하는데 필요한 신뢰할 만한 지도력을 제공하기 위해 노동자 운동과 실천적으로 상호작용하는 과정으로서 ‘헤게모니’를 설명하기도 했다. 익히 알려진, 해묵은 이야기다.

한나라당 미디어법 대리투표, 재투표 논란에 방문진 이사 뉴라이트 인사 대거 진입 등 정권의 공영방송 장악이 현실화된 시점, 케케묵은 헤게모니론을 거론하는 것 자체가 한가한 듯도 하다. 다만 헤게모니론을 전략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일정한 시기 특정 이슈에 대한 시민사회의 동의를 둘러싸고 형성되는 힘 관계의 차원에서 접근해보면 시사점도 없지 않다.

대통령과 방통위원장은 자신에게 부여된 합법적인 권한을 행사하고 집행한다.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다. 그러나 미디어 당사자와 시민사회의 동의를 구하는 데는 역부족이 역력하다. 반면 야4당을 비롯한 미디어운동 진영은 시민사회의 여론의 우위를 바탕으로 ‘언론악법 저지 100일 행동 시즌2’에 돌입하는 등 반전을 도모하고 있다.

8, 9월을 맞는 시점, 미디어법 공방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이명박 정부의 지배의 위기와 시민사회의 저항의 맥락을 놓고 볼 때 관전포인트는 무엇일까.

▲ 야4당과 언론시민사회단체, 네티즌들로 구성된 ‘언론악법원천무효 언론장악저지 100일 행동 시즌2’는 3일 오전 11시 서울 중구 명동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송선영
정부의 위기의 맥락

우선 이명박 정부가 겪는 위기에 대해 정통성의 위기로 해석하는 경우는 좀처럼 드물다. 그도 그럴 것이 대통령제라는 강력한 행정부 수반으로 500만이라는 압도적 지지로 당선된 데다 1년 반의 실정에도 불구하고 충성적인 지지기반이 몰락하지는 않고 있기 때문이다.

미디어법 통과 이후 각종 여론 조사는 부진한 결과를 뚜렷이 보여준다. 7월 30일 여론조사기관인 ‘리얼미터’의 발표에 따르면 이명박 대통령의 국정수행에 대한 긍정 평가가 24.7%(2주전 29.1%), 부정 평가가 67.3%(2주전 62.5%)로 나왔다. 한나라당 지지율은 28.0%(2주전 29.6%)로 하락한 반면, 민주당 지지율은 25.6%(2주전 22.1%)로 상승했다.

여의도연구소가 지난 25일 조사한 여론조사 결과도 그렇다. 이명박 대통령 지지율은 41.2%(7월6일)에서 31.1%(7월25일)로, 한나라당 지지율은 35.5%(7월6일)에서 26.3%(7월25일)로 나타났다. 민주당 지지율은 25.7%(7월6일)에서 26.1%(7월25일)로 유지된 걸로 나왔다. 이 결과로만 보면 민주당은 가만히 있는데 한나라당이 워낙 못해서 오차범위 0.2%p를 기록하게 됐다는 이야기다.

이처럼 각종 여론조사 결과는 이명박 정부의 지적.도덕적 지도력이 쇄락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명박 정부는 비정규직법, 쌍용자동차 사태, 용사참사 수수방관, 미디어법 강행처리 등 현안을 풀어나가는 데 있어 시민사회의 동의를 구하는데 실패하거나 애초에 유도하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여기에 친이와 친박의 내부 대결도 변수다. 현 정권의 지지층은 ‘이명박 아니면 박근혜’ 또는 ‘이명박 다음은 박근혜’라는 구도를 줄거리로 하고 있다. 박근혜 전 대표는 미디어법의 국민적 통합을 제기하며 일약 정세의 주인공으로 등극했다. 하지만 막판에 고개를 숙이면서 지적.도덕적 지도력의 허약성을 드러내고 말았다.

지난 24-25일 ‘윈지코리아컨설팅’이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박근혜 전 대표의 행보에 대해 ‘일관성이 없고 입장변화의 명분도 적어, 문제가 있었다고 본다’는 응답이 57.1%로 나왔다. ‘리얼미터’도 차기 대선주자 선호도로 박근혜 전 대표는 33%(2주전 36.5%)를 얻어 3.5%가 떨어졌다고 발표했다. 신학림 전 미디어행동 집행위원장은 “2MB 정권의 ‘언론장악 7대악법’으로 시작된 입법전쟁의 최대 패배자는 누구일까? 아무리 따져 봐도 박근혜 의원이 아닐까 싶다”고 짚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 측에서 볼 때 특별한 변화의 맥락이 읽히지는 않는다. 이명박 대통령은 27일 라디오연설에서 “국민들도 시간이 지나면 그렇게 이해될 것”이라고 말했다.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은 26일 기자회견에서 “지체 없이 방송법 시행령 개정 작업 등 후속조치를 해나가겠다”고 밝혔다. 한나라당은 28일 국회에서 열린 원내 대책회의에서 “민주당에 정치선전전에서 많이 밀린다. 앞으로 우리도 사안별로 민주당 의원들의 투표 방해 행위를 공개하자”고 결의했다. 한편으로는 쫓기는 모습도 없지 않다. 28일 이명박 대통령은 국무회의를 주재하고 미디어법 법률공포안을 의결했다. 국회에서 이송된 지 하루 만에 심야국무회의를 열고 행정 처리를 한 것이다. 무효 논란과 관계없이 법률을 집행해버림으로써 헌재의 판단에 물리적 압력을 가하겠다는 의중으로 풀이된다.

이런 가운데 31일 뉴라이트 인사들이 대거 방문진 이사 자리를 꿰찼다. 언론에 대한 정치적 개입에 있어 대통령과 방통위원장이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을 극대화하는 양상이다. 이같은 양상은 8,9월 정세에도 일관된 흐름을 보일 전망인데, 변화의 특별한 모티프가 없는 한 이명박 정부의 지적.도덕적 지도력은 현재 수준에서 유지되거나 떨어질 가능성이 커보인다.

시민사회 저항의 맥락

진지전의 맥락에서 볼 때 미디어 당사자와 시민사회는 이명박 정부의 강한 드라이브에 밀려 수세의 위치로 몰려왔다. 공영방송에 대한 정치적 장악, 검경의 네티즌 및 공영방송 탄압, 인터넷의 효과적인 통제가 주는 효과가 만만치 않다. 그러나 사회구성원의 저항의 맥락에서 볼 때 헤게모니를 내주고 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우선 작년 12월, 올 2월, 6월 세 차례 총파업투쟁을 전개한 미디어 당사자의 투쟁이 돋보인다. 한나라당의 미디어법이 조중동과 재벌에게 미디어 소유의 길을 열어주는 것이고, 보수세력의 정권 재창출의 물적 기반을 제공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시민사회에 제대로 알려냈다. 최상재 위원장은 대리투표, 재투표 사태가 벌어진 미디어법 날치기 현장을 목도하며 언론노조 총파업투쟁의 승리를 재차 확인했다. 최상재 위원장이 ‘승리’를 선언한 것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조합원들의 힘을 응축해 모아냈고 결과적으로 한나라당은 매끄럽지 않은 날치기 통과를 하고 말았다. 남는 문제는 있다. 미디어 당사자들이 총파업 투쟁을 통해 전체 반MB 전선을 효과적으로 운영했다는 평가는 정당하나, 공영방송을 비롯한 미디어 현장 주체들의 속사정은 만만치 않다는 점이다. 공영방송의 정치적 장악이라는 정부의 드라이브를 반MB전선의 차원에서 막아내는데는 선방했다고 하나, 제작.편성 등 공영방송 주체들의 프로그램 생산의 측면에서 보면 위축에 따른 보수적 경향이 커지고 있다는 지적이다.

이런 가운데 미디어법을 필두로 반MB전선의 뚜렷한 족적을 남겨온 ‘100일 행동’이 오늘 시즌2 실천에 돌입했다. 민주당이 한나라당의 미디어법을 저지해온 힘의 원천은 야4당을 비롯한 미디어운동과 네티즌, 시민사회의 연대에 있었다. 미디어운동 진영은 미디어법 논쟁 과정에 법안에 대한 민주당의 태도를 강제했고, 민주당은 이를 수용함으로써 이명박 정부에 맞서는 하나의 전선을 형성할 수 있었다. 한나라당의 미디어법이 날치기 처리되자 정세균, 최문순, 천정배 의원이 의원직 사퇴를 천명했다. 미디어법 국회 통과를 막지 못한 책임에 따른 처신이기도 하지만 의회의 틀을 박차고 시민사회와 호흡을 같이 하겠다고 나선 만큼 그 의미가 작지 않다.

한편으로는 민주당이 야4당과 미디어운동 진영과의 연대 흐름과 달리 보궐선거를 의식해 독자적인 흐름을 꾀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이같은 일이 사실이라면 중요한 시기 반MB전선에 찬물을 끼얹는 패착이다. 지금은 특정 정당, 특정 세력의 자기 이해를 앞세우기보다 이명박 정부와의 ‘힘 관계’의 긴장을 유지, 지속하는데 집중하는 게 중요한 시점이다. 그런 점에서 100일행동 시즌2는 시즌1보다 시민사회와의 연대를 보다 강화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하고, 크고작은 대립과 쟁점에서 시민사회의 동의를 확장하는, 말하자면 아래로부터의 ‘헤게모니’의 긴장을 떨어뜨리지 않도록 하는 게 관건이다.

저항의 근거 남기며 위기 확장 꾀해야

우선 법제도적인 차원에서 반MB 진영은 이길 수 없는 싸움을 하고 있다. 이명박 정부는 미디어법 국무회의 의결, 방통위의 종편.보도채널 추진, 헌재 압박 등 미디어법의 기정사실화와 집행에 속도를 더하고 있다.이를 막을 수 있는 절차적인 방안은 없다. 다만 앞서 지적한 것처럼 미디어법과 관련해서는 절차상에 큰 흠집이 생긴만큼 시민사회의 동의 속에 추진하기에는 한계가 따를 전망이다.

민주당 의원들의 서명전 현장에는 대리투표, 재투표에 대한 시민의 분노가 살아있음이 확인된다. 그런 점에서 100일행동 시즌2가 ‘날치기 언론악법 원천무효’를 강조하는만큼 이를 중심으로 얼마나 반MB전선의 흐름이 유지, 확대되는 지를 지켜보는 게 큰 틀의 관전포인트다. 보다 세밀하게는 공영방송을 지켜내는 안팎 주체간의 연대, 방송의 공공성을 위한 방통위원의 임무와 역할 강제, 종편.보도채널 자본 참여에 대한 언론소비자 주권운동의 확장 등 힘과 힘이 부딪히는 곳에서 크고작은 저항이 어떻게 만들어지는 지를 살펴보는 것이 훨씬 중요한 관전포인트다.

8,9월 단기적인 시기이긴 하지만, 이들 포인트를 종합하면 이명박 정부가 지적.도덕적 지도력, 즉 시민사회에 대한 ‘헤게모니’를 강화하는지, 아니면 한계를 더 노골적으로 드러내는지가 가늠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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