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기 싫은 사람들이 “나가겠다”고 하고, “분열은 안 된다”는 사람들이 상대를 제발 나가라고 등 떠미는 촌극이 며칠 째 이어지고 있다. 새누리당이 이런 코미디를 연출하고 있는 상황은 이들이 도대체 정치를 무엇 때문에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 의문을 불러 일으키게 한다.

19일 새누리당 내 비박계는 유승민 의원을 전권을 쥔 비대위원장으로 인선하지 않으면 탈당이 불가피하다고 못을 박았다. 유승민 의원은 친박계 핵심인사들에 대한 인적청산 의지를 분명히 하고 있다. 이후 상황의 키를 쥐고 있는 정우택 원내대표는 처음에 “유승민 비대위원장 주장이 비주류의 통일된 의견인지 확인해야 한다”고 하다가 나중에는 “당을 풍비박산 낼 사람은 안 된다”고 했다.

정우택 원내대표는 이날 원내지도부 인선을 강행했는데, 친박계로 확실히 무게중심이 쏠린 모습이 역력하다. 이정현 지도부 때 문제가 됐던 윤리위 인선을 원상복구하고 친박계 모임 해체를 요구하는 등 나름의 ‘분칠’에 골몰하고는 있으나, 당권을 넘겨주고 싶지는 않다는 의사는 명확히 하고 있는 셈이다. 당권을 쥐고 TK 지역기반만 지키고 있으면 언젠가 다시 반격의 기회가 온다는 속내다.

친박계의 이해할 수 없는 사고방식은 비대위원장 인선에 대한 새로운 안을 언론에 흘리면서 절정에 달하고 있다. 20일 일부 언론은 새누리당 비대위원장 후보로 김황식 전 국무총리,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가 거론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 중 김황식 전 총리의 경우 친박계와 비박계가 합의추대할 경우 비대위원장직을 수락할 수 있다는 구체적인 입장까지 거론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이들이 과연 새누리당의 무엇을 바꿀 수 있을지 의문이다.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 수 없고, 오로지 정치적 ‘향수’만을 불러일으키는 정치적 노인들이다. 당권만은 절대 놓지 않겠다는 친박계가 이들을 데려와서 마음대로 하게 둘지도 의문이다. 친박계는 이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결정을 할 것 같으면 언제든 무너뜨릴 수 있다는 생각을 할 것이다. 실제 위에 거론된 이들은 새누리당 내에서 더 이상의 조직적 힘을 발휘할 수 없는 인사들이다.

새누리당 정우택 원내대표가 20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의원총회에서 당 개혁의 전권을 갖는 것을 조건으로 유승민 의원을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추대하자는 비박(비박근혜)계의 주장과 관련해 "전권을 주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떤 인물이 오는지가 중요하다"고 밝히고 있다. (연합뉴스)

새누리당이 지금 한국 정치의 미래를 위해 해야 할 일은 박근혜 정권이라는 파탄적 권력을 탄생시킨 정치적 책임을 지는 것이다. 박근혜 정권 탄생 공신을 자처한 자들은 정치를 그만두거나 최소한 상당기간 정치를 포기하는 것이 상식적이다. 국민 앞에 자신들이 무엇을 잘못하였는지, 이 잘못을 어떻게 바로잡을 것인지 반성문을 제출하고 뼈를 깎는 실천을 하겠다고 약속해야 한다. 아마 이런 것으로도 국민의 마음을 되돌리기에는 부족할 것이다. 다음 대선에 후보를 내지 않고 처음부터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하겠다고 선언해도 모자랄 판이다.

그러나 친박계 의원들의 행태를 보면 이런 일은 전혀 기대할 수가 없다. 20일 새누리당 이인제 전 최고위원은 불교방송 라디오와의 전화연결에서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이 ‘르윈스키 스캔들’로 탄핵을 당할 때 민주당 의원들은 한 명도 이탈하지 않고 대통령을 지켰다”며 비박계를 비판했다. 이런 주장은 친박계에 가까운 인사들의 입에 공공연히 오르내리고 있다.

그러나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의 스캔들과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은 전혀 다른 층위에 있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의 스캔들은 그 내용이 아무리 고약한 것일지라도 개인의 행실과 도덕성에 관한 문제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은 박근혜 대통령이 국민에게 위임받은 권력을 선출되지 않은 사람에게 다시 빌려준 사건으로 헌정을 유린한 것이다. 이 두 사건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는 친박계의 인식은 왜 이런 사건이 21세기에 벌어졌는지 그 이유를 깨닫게 한다.

이는 친박계인 새누리당 이만희, 이완영, 최교일 의원 등이 JTBC가 보도한 태블릿PC에 대한 위증을 교사 또는 사전모의 했다는 의혹이 나오는 것과 마찬가지의 맥락에 있다. 공동체가 합의한 규칙의 내용과 관계없이, 오로지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것에 익숙한 보수정치의 태도가 여기서 드러난다. 태블릿PC를 JTBC가 훔쳤다고 하면 국정농단이 없던 일이 되는가. 서로 성격이 다른 문제들을 뒤섞어 같은 차원에 억지로 나열한 후 정치적 냉소를 끼얹어 국민을 속이려는 고질적 행태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태도로 일관하는 정치는 스스로를 망치는 자해적 정치다. 비박계가 일말의 양심이 있다면 세월아 네월아 하면서 시간을 끌 일이 아니다. 유승민 의원은 “탈당을 결정하더라도 결행에 시간이 걸릴 수 있다”면서 자신이 비대위원장이 되지 않더라도 바로 탈당하지는 않을 거라는 입장을 내비치고 있다. 비박계가 당을 나올 준비를 아직도 마치지 않았다는 뜻이다. 언론은 이들이 성탄절을 전후해 분당을 결행할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하고 있으나 이는 그야말로 두고 볼 일이다.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친박계가 비대위를 그야말로 깜짝 놀랄만한 인사들로 채워 탈당 명분을 축소하는 시나리오도 상상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당 밖으로 나간 인물들은 정치적 계산을 그만하라며 비박계를 향한 비판의 날을 세우고 있다. 이런 현실에도 불구하고 비박계가 “김무성 혼자 나가서는 효과가 없다”, “원내교섭단체 수준은 되어야 한다”, “잔류 새누리당을 고사시킬 정도는 되어야 한다”면서 핑계나 대고 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광야에 나가서 하고 싶은 정치가 도대체 무엇인지를 공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유승민 의원이 19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 자신의 집무실 앞에서 취재진 질문을 듣고 있다. (연합뉴스)

기실 비박계의 상당수는 박근혜 정권이 탄생할 경우 최순실 씨 등 이른바 ‘비선실세’의 국정농단 가능성을 어렴풋한 정도라도 감지했을 가능성이 큰 인물들이다. 이들이 이에 대한 반성을 하지 않고 새누리당을 떠나겠다는 것은 새로운 정치를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박근혜 정권의 탄생에 기여한 책임을 줄여 정치적 생명력을 연장해보고자 하는 기만적 술책에 불과하다.

반성이라는 것은 ‘반성한다’고 외치기만 해서 될 것이 아니다. 새누리당을 이미 탈당한 이들은 “나부터 반성하겠다”며 각자 반성을 하는 토론회까지 열었으나 성과는 미미한 것 같다. 박근혜 정권이 왜 탄생할 수 있었는지, 이런 비극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보수정치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그 답을 찾지 못하면 탈당을 수십번 해도 영원히 잘못된 정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유승민 의원은 과거 ‘배신의 정치’로 찍혀 당에서 쫓겨날 때 “민주공화국이라는 헌법의 지엄한 가치를 지키고 싶었다”고 말했다. 헌법을 지키고 싶었다는 사람들이 민주공화정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는 사람을 대통령으로 만들었다는 게 보수정치의 문제다. 권력을 갖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노선이나 지향 따위는 유행에 따라 갈아입을 수 있는 옷 같은 걸로 여기는 태도 그 자체가 문제다.

과연 비박계를 자처하는 의원 중에 자기 노선을 신실하게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는가. 이런 현실을 근본적으로 반성하지 않고 어떤 새로운 정치가 가능한가. 이런 식으로 떠밀리듯 탈당해서 도대체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가. 도저히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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