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일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킨 단어가 있었다. 처음 들어 생뚱맞기도 하려니와 발음하기도 조심스러운 단어, 바로 키친 캐비닛(Kitchen cabinet)이다. 대통령이 격의 없이 식사를 함께 하고 조언을 듣기 위해 불러 모은 사람들을 가리킨다는 미국식 정치용어다.

청와대는 국회 탄핵소추에 반박하는 답변서에서 가장 핵심쟁점으로 떠오른 최순실 국정농단을 ‘마사지’하기 위해 야심차게 이 단어를 꺼내들었다. 대통령이 여론을 광범하게 접하기 위해 식사 자리에서 격의 없이 여러 사람들을 만나곤 하는데 최순실도 그 중 하나였고, 그를 불러 자신의 연설문에 대한 자문을 구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을 듣자마자 맨 처음 나도 모르게 떠오른 생각은 "‘혼밥’을 즐기는 대통령이 키친 캐비닛을~?" 이란 의문이었다. 세월호 참사 당시 온 나라가 충격과 비통에 잠겼을 때도 꿋꿋하게 홀로 관저에서 혼밥을 먹었던 박근혜 대통령의 모습과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과 격의 없이 대화를 나누며 같이 식사하는 대통령의 모습이 전혀 매치가 되지 않아서다. 청와대 조리장의 증언에 따르면, 일요일 저녁 최순실과 같이 있을 때조차 둘은 밥을 각각 따로 먹었다지 않은가.

이어서 떠오른 생각인 즉, 백보양보해서 다양한 의견을 청취하기 위해 박 대통령이 식사시간을 즐겼다고 치자. 그런데 왜 하필 최순실하고만 그렇게 자주 만나는 거지? 눈도 감히 마주 치지 못한다는 시녀 같은 사람을? 게다가 대개의 경우 대통령과 대화를 주고받은 다음에는 각자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는 게 통상적인 모습이라고 하던데 최순실은 왜 제자리로 안 돌아가고 청와대에서 계속 맴돌았을까? 등의 허접한 의문들을 떨치기가 어려웠다.

이 단어가 이날 하루 종일 실시간 검색어에 이름을 올려놓고 있었다는 걸 생각하면 나만 유별난 것도 아니었던 모양이다. 백과사전을 뒤져야만 겨우 알 수 있는 생경한 영어단어의 돌발적인 출현 때문인지, 아니면 현학적인 외국의 정치용어로 자신의 치부를 감싸고 호도하려는 청와대의 뻔뻔한 대응에 대한 분노 때문인지 모르지만, 각 매체들 역시 답변서에 실린 키친 캐비닛을 분석하고 해부하느라 분주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그 결론은 모두가 알다시피 '치킨캐비닛'이었다.

아마 달리 결론을 내기도 어려웠을 게다. 아재 개그에 정통한 사람이 아니라도 이건 너무나 눈에 뻔히 들어오는 조합이었으니까. 그래서 "위 아 더 월드"를 외치듯이 모두가 한 마음이 되어 앞뒤를 바꾸는 간단한 말장난만으로 청와대를 향해 맘껏 비웃음을 날릴 수 있었던 거 아닌가.

19일 JTBC 뉴스룸 팩트첵크

그러나 뭔가 아쉬웠다. '키친 캐비닛'을 '치킨캐비닛'으로 즉자적으로 꼬집고 비트는 것도 좋지만, '키친 캐비닛'이 왜 '치킨캐비닛'일 수밖에 없는지를 논리적으로 좀 더 명확하게 밝혀낼 수 없을까? 이런 갈증을 속 시원히 풀어준 것이 19일자 JTBC 뉴스룸이었다. 청와대가 "키친 캐비닛"을 내세웠지만 과연 그로써 ‘최순실 국정농단’을 합리화시킬 수 있을까를 따져 묻는 팩트체크 시간 말이다.

‘팩트체크’가 추적한 바에 따르면, 이 단어가 언론에 처음 등장한 것은 1832년 3월이다. 앤드류 미 대통령이 취임과 더불어 동향 출신의 비공식라인을 운용했는데, 잭슨을 반대하는 쪽에서 그가 비선에 의존을 많이 한다 해서 키친 캐비닛이란 은어를 만들어내서 비판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키친 캐비닛의 원래 뜻은 '비선실세'인 것이고 그 해석대로라면 청와대가 이 답변서를 통해 외려 최순실이 비선실세임을 자인하는 꼴이 되고 만다는 거다.

‘펙트체크’는 또 미 대통령제 시행 초기에 활동했던 앤드류 잭슨이 당시 참모조직을 제대로 갖추기 어려워 임시방편으로 활용했던 것이 키친 캐비닛이라면서, 200년이 지난 지금 박근혜 대통령 자신이 구성한 비서실과 헌법이 보장한 3개의 자문기구, 그리고 16개의 대통령 직속위원회까지 거느리고 있는 박근혜가 무엇이 부족해 '키친 캐비닛' 운운하고 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고 논박한다.

요컨대, 연설문 외에도 외교안보, 대북정보, 해외 순방, 국무회의, 인사 자료까지 국가를 좌지우지하는 정보들을 유출한 혐의를 받고 있는 대통령 자신의 잘못을 가리기 위해 "엉뚱한 키친 캐비닛으로, 그것도 정확히 잘 모르는 개념"으로 본질을 흐리려고 하는 게 아닌지 의심스럽다는 게 팩트체크의 진단이다. 그래서 팩트체크는 키친 캐비닛 소동을 "제 발등 찍기"로 간략하게 정의한다. 참으로 깔끔한 정리 아닌가.

상기한 팩트체크의 추적보도로 확실히 알게 된 것 하나를 굳이 꼽자면, 비선실세 의혹을 덮는답시고 외려 비선실세를 뜻하는 말로 자신을 포장한 청와대 사람들은 그래서 '치킨캐비닛'이란 말을 들을 수밖에 없다는 것, 단순히 말장난이 아니라 논리나 역사 어느 측면에서 보더라도 '치킨캐비닛'으로 부를 수밖에 없게 됐다는 것이다. 누가 강요하지 않아도 제 스스로 커밍아웃 하는데 그걸 누가 말리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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