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혁명을 떠올렸다. 정병국 의원의 주장 때문이다. 따뜻한 둥지를 떠나긴 싫고, 그렇다고 신당을 창당하자는 김무성 전 대표의 주장을 무시할 수도 없는 비박계들의 혼란이 그대로 드러난다.

정병국 의원은 14일 KBS제1라디오와의 전화연결에서 친박계가 당권을 재장악할 경우 어떻게 하겠냐는 질문에 “친박 모임에 있는 사람들을 뺀 나머지가 중심이 돼서 저희 나름대로 원내대표를 구성해 야당과 함께 정국을 이끌어 간다든지 하는 방법을 고려해보겠다”고 대답했다. 또 “나가는 게 아니라 그 사람들(친박)을 무시하는 것”이라고도 주장했다. 정병국 의원은 탈당해서 별도의 교섭단체를 구성하려는 목적이 아니냐는 질문에는 “교섭단체는 새누리당이지만 대표성을 국민들과 다른 정치세력이 인정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저희가 인정을 받는 세력이 되겠다는 것”이라고 답했다.

이런 발언을 종합하면 김무성 전 대표를 제외한 비박계들이 그리고 있는 대략의 그림이 그려진다. 16일 원내대표 선거에서 패배할 경우 비박계가 자체적인 원내지도부를 꾸리겠다는 것이다. 이렇게 될 경우 형식상으로는 하나의 당이지만 내용적으로는 두 개의 당인 당 내 이중권력 상태가 만들어진다.

러시아 혁명을 이끈 것은 흔히 ‘볼셰비키’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다수파’라는 뜻의 러시아어일 뿐이다. 이 용어의 기원은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의 1903년 제2차 당대회다. 의견대립이 뚜렷한 안건의 표결에서 이긴 쪽이 스스로를 ‘다수파’로 자처한 것이다. 1917년 혁명이 성공할 때까지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은 조직 형태가 유지됐으나 실질적인 활동은 볼셰비키와 멘셰비키로 나뉘어 사실상 두 개의 다른 당처럼 이루어졌다.

정병국 의원이 이런 주장을 한 것은 황교안 체제에 대한 야권의 대응과도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더불어민주당, 국민의당, 정의당 등은 13일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와 각 당 대표단과의 회동을 제안하는 자리에서 새누리당 이정현 대표를 제외하겠다고 밝혔다. 야3당은 이 전날 여야정협의체 구성을 주장하는 자리에서도 새누리당 이정현 대표 문제를 배제하겠다고 주장한 바 있다. 더불어민주당 우상호 원내대표는 친박계 원내대표가 탄생할 경우 대화를 하지 않겠다고 공개적으로 발언했다. 정병국 의원의 주장은 이런 분위기 속에서 새누리당을 실질적으로 대표할 세력이 비박계가 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려는 것으로 보인다.

새누리당 정병국 의원(오른쪽)이 6일 오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비상시국위원회 대표자-실무자 연석회의에서 생각에 잠겨 있다. (연합뉴스)

물론 21세기에 러시아 혁명의 방법론이 통할 수는 없다. 따라서 정병국 의원이 주장한 바는 단기적으로는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실현이 어렵다. 그럼에도 이런 주장을 내놓는 이유는 김무성 전 대표 등의 신당 창당 주장과 친박계의 상식 이하의 대응 사이에서 돌파구를 찾을 수밖에 없는 입장에 처했기 때문이다.

세간의 시선으로 볼 때 비박계 인사들이 집단 탈당을 통해 신당을 창당하면 되는 문제인데, 현재 비박계 인사들의 입장에선 결단이 쉽지 않다. 대표적으로는 500억원에 달하는 걸로 추산되는 새누리당 자산 문제다. 김무성 전 대표는 이에 대해 자신들은 이 자산을 한 푼도 가질 생각이 없으며 당 해산 이후 국고에 귀속시킬 것이라고 해명하고 있다.

그러나 자산을 갖는 게 문제가 아니라 ‘남겨두고 나오는 것’이 문제이다. 친박이나 비박이나 똑같이 빈털터리가 된다면 붙어볼만한 일이 되지만 무일푼으로 거리에 나온 비박계와는 달리 친박계 주머니에 여전히 500억원이 남아 있다면 다시 생각해볼 문제가 된다. 지역구 의원의 경우 당장 2020년 선거를 앞두고 자원이 풍부한 새누리당의 공천 예정자들과 라이벌전을 시작해야 하는데, 아무래도 부담이다.

김무성 전 대표의 구상은 ‘개헌’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걸로 보인다. 보수정당이 난립하더라도 내각제 요소가 가미된 개헌이 가능하다면 여전히 연립정부 구성 등을 통해 보수정권 창출이 가능하다는 거다. 그러나 개헌은 국민투표까지 거치는 어려운 작업이다.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 지지자들이 ‘제2의 3당합당’이라고까지 하는 상황에서 개헌 추진 세력이 국민적 공감대를 만들 수 있을 것인지 의문이다. 개헌이 된다는 보장도 없는데 김무성 전 대표를 따라 풍찬노숙을 감행할 의원들이 얼마나 될지 확언할 수가 없다는 뜻이다.

여러 현실적 어려움이 있더라도 하고자 하는 것이 명확하면 신당 창당을 강행할 수도 있다. 그런데 권력을 창출하겠다는 것 말고 김무성 전 대표 등이 실질적으로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오히려 선도탈당한 남경필 경기도지사 등은 적어도 ‘협치’, ‘직접민주주의’ 등을 내세우는 것을 볼 때 콘텐츠 측면에서 긍정적인 면이 있다. 이런 지향점이 있어야 대중적 지지가 생길 수 있는데, 비박계는 친박계 때문에 괴롭다는 것 외에는 별다른 전망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결국 정병국 의원의 구상은 ‘나가기 싫다’는 의사의 반영이라고 밖에 볼 수가 없다. 지금 당장이야 김무성 전 대표의 신당창당론으로 ‘배수의 진’을 쳤으나 시간은 비박계의 편이라고 판단하는지도 모른다. 친박계가 지나치게 강경하게 대응하면서 오히려 동력을 잃고 있다는 진단도 나오기 때문이다.

친박계는 13일 비박계에 맞서는 일종의 구당모임(?)인 ‘혁신과 통합 보수연합’을 공식 출범시켰다. 이들은 현역 의원 56명이 동참하고 있다고 주장해왔으나 실제 이 자리에 모습을 드러낸 현역 의원은 37명에 불과했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 반대표가 56표였고 11일 혁신과 통합 보수연합 사전모임에 참석한 현역 의원은 40여명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조직화에 전혀 힘이 실리지 않고 있는 셈이다.

대통령에 대한 징계를 막기 위한 친박계 지도부의 무리수가 당내 여론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도 문제다. 새누리당 최고위원회는 13일 박근혜 대통령의 징계 수위를 논의하고 있는 윤리위원회에 친박계 위원 8명을 추가로 인선했다. 이 여파로 새누리당 이진곤 윤리위원장은 사퇴했다. 7명으로 구성돼있던 윤리위에 특정 입장을 가진 8명이 추가 인선됐다는 것은 사실상 기존의 윤리위가 무력화된다는 점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새누리당 윤리위는 20일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징계를 최종 결정할 예정인데 탈당 권유나 제명 등의 중징계가 내려질 가능성이 관측됐었다. 이런 상황을 막기 위해 친박계 지도부가 손을 쓴 거라는 게 이진곤 윤리위원장 등의 입장이다. 이런 상황에 대해서는 새누리당 정진석 원내대표 마저 “주위에서 정신이 나갔다고들 한다”고 평하고 있다.

이런 현실은 결국 16일로 예정된 원내대표 선거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원내대표 선거에서 비박계 원내대표가 탄생하면 김무성 전 대표의 탈당 명분도 축소된다. 이후 비대위원장 구성 문제가 남아있고 친박계 지도부가 끝까지 저항하겠지만 마지막까지 친박계가 중심이 되는 조직화가 이뤄지지 못하면 그것도 사상누각에 불과할 뿐이다. 어떻게든 비박계가 당권을 접수하면 당 해산 등의 ‘퍼포먼스’를 시도하겠지만, 결국 민주자유당을 기원으로 하는 형태의 단일보수정당의 형태는 남을 가능성이 커지는 셈이다. 과연 비박계가 이런 식으로 안락하고 따스한 곳에서 운신하다 2020년 재기에 성공할 것인지는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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