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에서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된 이후 새누리당은 ‘내전’ 상태로 접어들고 있다. 친박계가 주말 동안 대규모 회동을 통해 결속력을 다지는 가운데 비박계가 ‘친박 8적’ 명단을 공개하며 인적청산 요구를 노골적으로 내놓고 나서고 있는 것이다.

비박계들의 논의 기구인 비상시국위원회의 대변인 역할을 자처하고 있는 새누리당 황영철 의원은 12일 인적청산 대상인 ‘친박 8적’의 명단을 공개했다. 이정현 대표, 조원진 이장우 최고위원, 서청원 최경환 홍문종 윤상현 김진태 의원 등이 그 주인공이다. 황영철 의원은 “이 8명은 조속히 당을 떠나 우리 당이 새롭게 출발할 수 있게 해줘야 한다”면서 그래야 새누리당이 국민의 지지를 다시 회복할 수 있다는 점을 명확히 했다.

비박계의 인적청산 요구는 예고된 수순이다. 지난 9일 탄핵소추안 의결 과정에서 김무성 새누리당 전 대표는 ‘인적청산, 현실적으로 불가능, 탈당’ 등의 문구가 적힌 메모를 기자들에 노출했다. 인적청산을 요구하지만 이는 현실적으로 불가능 할 것이기에 최종적으로는 탈당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는 취지의 구상을 한 것으로 읽힌다.

그러나 비박계는 주말 동안의 논의에서 탈당을 선택하는 것은 시기적으로 이르다는데 의견을 같이 했다. 대구경북을 정치적 기반으로 하는 유승민 의원이 당 잔류를 강하게 주장하고 여기에 나경원 의원 등도 동조했다는 것이다. 잘못한 것은 친박계인데 왜 비박계가 당을 나가야 하느냐는 항변이다. 탈당은 인적청산 요구를 실제로 제기해보고 나서 선택해도 늦지 않는다는 이야기나 다름이 없다.

11일 오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새누리당 비상시국회의에서 김무성 전 대표, 유승민 의원 등 참석 의원들이 정국현안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왼쪽부터 이군현, 유승민, 김무성, 정병국. (연합뉴스)

‘인적청산’이라는 건 대통령을 탄핵하는 것과는 또 다른 문제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은 친박계 의원들이 마음 아파하면 끝나는 문제지만, 당내의 인적청산 요구에는 생사가 걸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찌됐든 친박계로서는 가만히 앉아있을 수가 없다. 친박계가 주말에 50여명을 모아 대규모 회동을 강행하고 ‘혁신과 통합 연합’이라는 이름의 구당모임(?)을 구성하고 비박계 인사들에 대하 강력한 저항을 시작한 것은 이런 이유다.

이런 상황만 보면 곧 분당이 가시화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을 따지면 그렇지 않다. 탄핵소추안의 압도적 가결은 오히려 새누리당의 분당 가능성을 축소했다. 만일 탄핵소추안이 아슬아슬하게 가결되었거나 부결되었다면 비박계로서는 탈당 이외의 다른 선택지를 찾기 힘들다. 그나마 234표라는 결과가 나왔기 때문에 인적청산을 요구하는 수준에서 당 잔류를 일단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비박계가 특히 ‘친박 8적’을 공개적으로 언급한 것은 의미심장한 대목이다. 뒤집어 말하면 이 8명만 정치적 불능 상태로 만들 수 있다면 나머지 문제는 ‘해체에 준하는 재창당’으로 해결 가능하다고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혁신과 통합 연합을 구성하는 50여명 중에 이들 8명을 제외한 나머지 40여명은 구제(?)가 가능한 것이다. 친박계와 비박계의 협상에 따라 8명이 전부 ‘불능화’될지도 장담할 수 없다.

1차적인 전선은 비상대책위원회 구성이다. 언론은 친박계의 조직적 저항이 결국 비대위원장 인선과 비대위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에 영향을 미치기 위한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비대위를 어떻게 구성하느냐에 따라 친박계에 대한 인적청산 요구의 폭과 깊이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정현 대표는 같은 날 오는 21일 사퇴하겠다는 기존의 약속을 지키지만 다른 최고위원들은 사퇴하지 않으며, 친박계과 비박계가 비대위 구성 합의에 도달하지 못할 경우 남은 지도부가 비대위 구성을 주도할 수 있다는 취지의 주장을 내놨다. 결국 당권을 쥔 상태에서 비대위 구성을 놓고 비박계와 ‘딜’을 시도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비대위 구성에 이후 상황이 크게 좌우될 수 있다는 점은 비박계가 규정한 ‘친박 8적’에 정진석 원내대표가 포함되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이에 대해 황영철 의원은 “정진석 원내대표는 지금까지 당에서 균형추 역할을 잘 수행했다고 보고 친박 지도부와는 구분해야 한다”, “정진석 원내대표가 그 역할을 더 할 수 있도록 힘을 보태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실제 정진석 원내대표는 완전한 친박도 비박도 아니라는 이유로 ‘낀박’이라는 등의 평가를 받아온 인물이다. 친박계는 정진석 원내대표 취임 직후부터 자신들의 구상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길들이기’에 나선 바 있다. 정진석 원내대표는 탄핵 정국에서도 대통령에 대한 탄핵을 반대한다면서도 탄핵소추안 표결에는 ‘자유투표’를 하도록 해 친박계의 비난을 한 몸에 받았다.

그런데 비박계의 정진석 원내대표의 태도는 단지 이런 이력을 평가한 것으로만은 볼 수 없다. 핵심은 당권을 친박계가 독점하고 있는 상태에서 그나마 비박계의 의견을 공식라인에 반영할 수 있는 유일한 인사가 정진석 원내대표라는 데에 있다. 이정현 대표가 사퇴하는 경우 당헌 당규에 따라 정진석 원내대표가 권한대행을 맡게 된다. 앞서의 시나리오로 보면 이정현 대표 사퇴 이후 비대위 구성에 정진석 원내대표가 상당한 역할을 해야 할 가능성이 커진 것이다.

변수는 정진석 원내대표가 이미 사퇴 의사를 밝혔다는 점이다. 정진석 원내대표가 그간 공언해온 대로 사퇴할 경우 새누리당 소속 의원들은 사퇴 이후 일주일 안에 원내대표를 새로 선출해야 한다. 친박계로서는 최대한 자신들의 입장에 가까운 원내대표를 선출하기 위해 조직적으로 움직여야 한다. 친박계의 세규합은 이러한 시나리오를 대비하기 위한 것으로도 해석된다.

새누리당 이장우 최고위원이 12일 오전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김무성·유승민 의원 등 비주류계 의원들을 맹비난하고 있다. 왼쪽은 이정현 대표. (연합뉴스)

친박계과 비박계의 대결은 결국 당권을 누가 가질 것이냐의 문제로 귀결되고 있는 셈이다. 친박계가 승리하면 새누리당은 사실상 현상유지를 선택해야 하고, 이럴 경우 비박계의 이탈 가능성은 좀 더 높아진다. 먼저 탈당한 남경필 경기도지사 등이 자산의 국고 환수 및 당 완전 해체까지 언급하고 새누리당 잔류파를 강하게 비난하며 신당 창당을 언급한 것은 이런 경우의 수를 내다본 것으로 해석된다.

반면, 비박계가 승리하면 새누리당은 친박계 몇 명의 희생을 제물로 삼아 ‘해체에 준하는 재창당’ 등의 ‘포장지 바꾸기’를 결행할 것이다. 당 잔류를 희망하는 비박계 의원들은 당장은 국민들의 손가락질을 받을지 모르지만 이 정도로만 해도 2020년 총선에 이르는 과정에서 나름대로 지지층의 안정적 수습이 가능하다고 믿는 쪽인 것 같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새누리당은 수십년에 걸쳐 쌓인 조직과 재정을 갖고 있는 정당이다. 때문에 어떤 수를 쓰든 당을 깨지 않는 선에서 친박계와 비박계가 절충을 이룰 가능성이 가장 크다. 그러나 이들이 늘 해왔던 대로 보수정치의 ‘포장지 바꾸기’에 결국 성공한다 하더라도 국민은 여기에 속아줄 것인지는 미지수다. 로마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았다고들 하는데, 망하는 데 하루가 걸린 것도 아니다. 새누리당 소속 의원들이 눈 앞의 당권을 놓고 벌이는 싸움은 결국 빨리 망하느냐 천천히 망하느냐의 선택일 뿐이라는 지적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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