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의 일주일이 시작됐다. 230만 촛불 민심에 놀란 비박계가 사실상 탄핵 찬성 입장으로 돌아서면서 박근혜 대통령은 ‘외통수’에 걸린 모양새다. 지난 3차 대국민담화를 통해 퇴진 의사를 밝혔으나 ‘약발’이 전혀 먹히지 않는 정국에 내몰리게 됐기 때문이다. 마음이 돌아선 비박계가 청와대와의 소통 자체를 거부하고 최후 방어선 역할을 하던 친박계까지 흔들리면서 보수정치는 궤멸 위기에 처하게 됐다.

청와대가 매일 진행하던 대언론 브리핑을 5일 취소한 것은 이러한 상황의 반영이다. 일부 언론은 박근혜 대통령이 이르면 6일 4차 대국민담화를 통해 ‘4월 퇴진, 6월 조기대선’ 일정을 밝힐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새누리당 최고위원회는 이날 박근혜 대통령의 조속한 입장 표명과 구체적인 퇴진 일정 제시를 요구하기로 했는데, 이 역시 이를 위한 포석이라는 해석이다.

그러나 4월 퇴진 등의 일정이 이미 국민적 차원에서 거부되고 있는만큼, 이런 일련의 조치들이 어느 정도의 효력을 발휘할지는 의문이다. 비박계가 탄핵 찬성 입장으로 돌아서고 청와대와의 협의를 거부하는 것은 이미 박근혜 대통령의 4월 퇴진 의사를 탄핵 표결에 대한 판단의 근거로 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내비친 것이나 다름이 없다.

물론 박근혜 대통령이 4차 대국민담화를 진행할 경우 소폭의 보수층 결집 정도의 효과는 노려볼 수 있다. 그러나 이마저도 기대 이하의 수준에 그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박근혜 대통령의 정치적 기반인 대구경북 지역에서도 대규모의 촛불시위와 새누리당에 대한 반발 정서가 확대되고 있다는 사실이 이런 판단을 뒷받침한다.

박근혜 대통령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박사모가 주최하는 집회의 참가 인원 수 증가가 아니라, 비박계가 탄핵에 동참하지 않을 수 있는 ‘명분’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3차 대국민담화에도 불구하고 약 230만명이 거리로 뛰쳐 나오면서 이런 경우의 수는 없다는 게 실증됐다. 따라서 박근혜 대통령이 상황을 뒤집기 위해 쓸 수 있는 카드는 이제 없다.

박근혜 대통령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대응은 응집력이 약한 비박계 의원 개개인에 대한 물밑 작업을 진행하는 것뿐이다. 정치적으로는 외통수에 걸려 있으나 박근혜 대통령은 여전히 살아있는 권력으로서 수사기관과 정보기관을 쥐고 있다. 검찰이 이번 사건을 수사하면서 박근혜 대통령과 정면대결을 감수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긴 했으나, 여전히 인사권을 쥐고 있는 것은 청와대라는 사실에서 벗어날 수는 없을 거다.

새누리당 김무성 전 대표(오른쪽)와 유승민 의원이 4일 오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비상시국회의 전체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비박계 의원들이 이런 ‘공작’에 흔들리지 않으려면, 탄핵 전선에서 이탈할 경우 일어날 일이 박근혜 대통령에게 밟히는 것보다 더 큰일이라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 230만 시민의 촛불시위는 비박계 의원들에게 실제 이런 공포감을 선사하고 있다. 여론이 충분히 뒷받침 되기만 한다면 수사기관 역시 권력의 부당한 지시에 어느 정도 수준까지는 저항할 수 있다. 엘시티 비리 의혹 수사 지시에 대해 검찰이 현기환 전 정무수석의 구속으로 답하는 것을 보면 그렇다.

박근혜 대통령이 4차 대국민담화를 통해 자신에게 제기된 의혹에 대한 ‘해명’을 시도할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그런데 이 경우 역시 돌아선 국민의 마음을 잡기는 어렵다. 박근혜 대통령의 해명은 자신이 실제로 잘못한 일은 측근 관리에 실패한 것밖에 없으며, 나머지는 나라를 위한 일이었다는 내용을 벗어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는 박근혜 대통령이 실제로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스스로 어떠한 종류의 ‘사익 추구’에서 자유롭지 못했다는 사실을 인정할 경우 뇌물죄 혐의를 피해갈 수 없다는 이유도 작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즉, 이런 경우 4차 대국민담화는 피의자 신분인 대통령의 ‘법적 대응’의 성격을 가진 것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고, 국민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여론의 눈치를 살피고 있는 비박계가 움직이지 않으리라는 것 역시 예정된 수순이다.

이렇게 따져보면 결국 비박계가 스스로 무너지지 않는 한, 9일 탄핵은 가결이 되고야 말 것이다. 문제는 이후 상황이다. 친박계가 여전히 탄핵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상황에서 비박계가 탄핵 찬성 표결을 강행하면 새누리당은 사실상의 분당 절차를 밟게 될 가능성이 크다. 다음 총선 전에 ‘보수 결집’이 현실화되기를 바랄 수밖에 없는 친박계의 시나리오에서 비박계는 언젠가 배신자로 규정될 수밖에 없고, 보수-온건파를 견인해 중도파와 결합하려는 비박계의 시나리에오선 친박계의 존재가 걸림돌이 되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다시 말하자면 비박계의 ‘결단’이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는 향후 정계개편에 대한 로드맵이 있어야 한다. 그간 더불어민주당 측 인사들은 바로 이 시나리오에서 비박계와 국민의당이 일종의 중도-보수연합을 구축할 가능성이 크다는 주장을 제기해왔다. 물론 탄핵 국면 직후에 이러한 시나리오가 작동할 것인지는 의문이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대선을 앞두고 어떤 형식으로든 이들 사이의 선거연합이 현실이 되는 건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새누리당 이정현 대표가 5일 오전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비공개 전환 후 퇴장하던 한 기자의 질문을 받고 있다. 이 대표는 답변하지 않았다. (연합뉴스)

이런 가능성을 눈 앞이 다고, 만일 친박계가 자신들이 참여하는 ‘보수 결집’과 ‘보수재집권’을 포기하지 않겠다면 새누리당 분당 스케쥴을 최대한 뒤로 미루는 움직임을 보일 수밖에 없다. 이 경우 친박계는 찬성을 하지 않더라도 탄핵 표결에 참여를 해야 하며 비박계의 찬성 표결을 최대한 양해해야 한다. 그래야 40%에 이르는 보수적 유권자를 대변하는 단일한 대오를 유지해 훗날을 도모할 수 있다. 즉, 친박계로서는 박근혜 대통령과 운명을 같이 해 ‘강경보수’로 남을 것이냐, 아니면 민주자유당-신한국당-한나라당-새누리당이라는 틀을 유지할 것이냐의 선택을 앞두고 있는 것이다. 비박계의 ‘유턴’에 대한 친박계의 반응을 전하는 언론의 보도가 엇갈리는 것은 친박계가 이런 ‘자중지란’에 빠졌기 때문이다.

상황이 복잡할수록 원칙을 지키려는 결의가 필요하다. 박근혜 권력은 보수정치세력이 오로지 자신들의 권력 유지만을 위해 만들어 낸 정권이다. 나라를 잘 다스리기 위한 어떤 방법론들의 차이에 대해 고민하며 신심을 다해 이뤄낸 성격의 정권이 아니다. 이 책임은 친박계와 비박계가 모두 피해갈 수 없다. 즉, 새누리당에 적을 두고 있는 정치인들은 ‘어떻게 살아남을 것이냐’가 아니라 ‘이 정권을 탄생시킨 책임은 어떻게 질 것인가’를 중심에 놓고 판단을 내려야 한다.

즉,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은 새누리당의 ‘결자해지’해야 한다. 이들의 책임은 단지 탄핵이 가결된다고 해서 없어지지 않는다. 정치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는 박근혜 정권을 탄생시킨 ‘새누리당’이라는 형태의 보수연합을 이제는 끝내고 스스로 다음 대선에 후보를 내지 않는 결단이 필요하다. 이런 정도의 책임 정치를 할 수 있어야 훗날 국민들이 다시 보수정치세력에 신뢰를 갖는 날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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