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쨌든 ‘퇴진’까지 오기는 왔다. 박근혜 대통령이 29일 3차 대국민담화를 밝힘으로써 상황은 급반전되고 있다.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이 스스로 거취를 결정한다는 게 아니라 국회가 합의하는 내용을 따르겠다는 형식이어서 논란은 가중될 것으로 보인다.

박근혜 대통령의 이날 담화는 크게 두 가지 맥락을 포함하고 있다. 하나는 자신의 퇴진 과정에 대한 것이고 또 하나는 자신에게 제기되는 범죄 의혹과 관련된 것이다. 먼저 대통령의 퇴진 과정에 대한 언급은 “임기 단축을 포함한 진퇴문제를 국회의 결정에 맡기겠다”, “여야 정치권이 논의하여 국정 혼란과 공백을 최소화하고 안정되게 정권을 이양할 수 있는 방안을 만들어주면 그 일정과 법 절차에 따라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겠다”는 대목에 나타나 있다.

이러한 표현은 두 가지 방법을 지시하고 있는 걸로 보인다. 첫째는 국회 추천 국무총리에게 국정 운영의 권한을 이양하고 자신은 2선으로 후퇴해 있는 상태에서 적절한 시기에 물러나겠다는 것이다. “국정 혼란과 공백을 최소화”, “안정되게 정권을 이양할 수 있는 방안”과 같은 표현이 이를 반영한 걸로 볼 수 있다.

둘째는 일각에서 제기된 임기 단축 개헌을 정치권이 합의해서 추진해달라는 것이다. “임기 단축을 포함한 진퇴문제를 국회의 결정에 맡기겠다”, “그 일정과 법 절차에 따라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겠다”는 대목에서 이러한 의도를 읽을 수 있다. ‘임기 단축’은 오로지 박근혜 대통령의 사임 결단에 의해서만 가능한데 이를 국회에 떠넘기고 있기 때문이다. 국회가 대통령의 임기를 단축할 수 있는 방법은 이른바 현직 대통령의 임기를 경과적으로 규정하는 ‘원포인트 개헌’ 뿐이다. 굳이 “법 절차”를 언급하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다.

두 요소를 혼합한 해법을 요구한 것으로도 받아들일 수 있다. 국회가 임기 단축 개헌을 추진하되 정치권 원로들이 제시한 일정인 내년 4월 이전으로 일정을 못 박고 이 기간 동안의 국정 운영을 국회 추천 총리가 맡도록 하는 방식이다. 어찌됐건 대통령 스스로는 사임 일정을 밝히지 않는 방식으로 사태를 마무리 하겠다는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29일 오후 청와대 춘추관 대브리핑실에서 제3차 대국민담화를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문제는 박근혜 대통령이 시사한 이런 방식이 탄핵 전선의 균열과 붕괴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당장 탄핵 가결의 키를 쥐고 있는 비박계의 기류가 문제다. 친박계가 ‘박근혜 대통령이 퇴진 의사를 밝혔는데 탄핵을 추진할 이유가 없지 않느냐’는 논리를 들이대면 탄핵에 동조했던 비박계 의원들이 흩어져 버릴 가능성이 커진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는 이정현 지도부 이후 비대위원장을 누구로 하느냐의 문제도 걸려 있다. 친박계와 비박계가 이후 당권의 향방과 보수재집권 로드맵을 고리로 탄핵 찬성 철회라는 정치적 이면합의(?)를 이룰 가능성도 있다는 이야기다.

정치권 원로들이 특히 ‘4월’을 시한으로 정한 대목이 ‘보수재집권 로드맵’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에 대해서도 따져보아야 한다. 결국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대권 도전을 위한 시간을 벌자는 취지가 아니냐는 지적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구도는 대선 일정이 빨라지면 빨라지는 대로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에게 유리한 국면이 조성돼있다. 문재인 전 대표는 그간 중도적 색채를 내보이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으나 여전히 범보수 성향 유권자들은 막연한 거부감을 공유하고 있는 상황이다.

국회가 박근혜 대통령의 임기 단축을 핵심으로 하는 ‘원포인트 개헌’에 합의할 수 있을지도 문제다. 이런 형태의 개헌이더라도 국민투표를 포함한 절차를 모두 밟아야 하는데 권력구조 개편까지 합쳐서 논의하자는 제안이 나올 경우 논의는 지지부진해질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개헌 논란에는 정계개편 문제까지 걸려있기 때문에 혼란이 더욱 가중될 수도 있다.

박근혜 대통령의 구상이 실현될 경우 국회 추천 국무총리를 누구로 하느냐도 ‘야권 분열’의 씨앗으로 작용할 수 있다. 이미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은 김병준 국무총리 후보자 지명 이후 국면에서 국회 추천 국무총리를 누구로 하느냐를 두고 신경전을 벌여왔다.

언론은 손학규 전 의원이나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비대위 전 대표를 유력한 국무총리 후보로 언급해왔으나 더불어민주당 주류는 이들이 ‘개헌론자’라는 점에서 반감을 표시해 왔다. 국회 추천 국무총리가 권력구조의 개편을 포함하는 개헌을 추진할 경우 문재인 전 대표를 고립시키는 정계개편이 이뤄질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결국 이런 관점으로 보면 박근혜 대통령이 3차 대국민담화를 통해 밝힌 퇴진 구상은 문제를 매끄럽게 해결하기 보다는 정치권의 논란을 더 키우고 혼란을 가중시킬 가능성을 안고 있는 셈이다. 이 결과는 탄핵 무산 또는 연기 및 보수재집권 시나리오의 재시동이라는 결말로 이어질 가능성이 다분하다.

박근혜 대통령의 담화문에 드러난 또 다른 점은 자신에게 제기되는 범죄 의혹에 관한 것이다. 이에 대한 박근혜 대통령의 주장을 요약하면 최순실 씨의 국정농단 등에 적극 가담했다는 의혹은 사실이 아니며 자신은 국가를 위한 공적 사업이라는 관점에서 일을 진행했을 뿐이라는 거다. 그 과정에서 사익을 추구한 일이 없고 어떠한 개인적 이익도 취하지 않았으며, 잘못이 있다면 주변 관리를 하지 못한 것 뿐이라는 주장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가까운 시일 안에 여러 가지 경위에 대해서 소상히 말하겠다”고도 밝혔는데 이는 결국 특검 조사를 대비한 법적 해명을 예고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검찰 조사를 중립적이지 않다는 이유와 바쁘다는 핑계로 거부한 상황에서 특검 조사를 과연 받겠느냐는 의문도 나오지만 일단은 거부할 명분이 없는 상태에서 내놓은 발언이라는 해석이다.

결국 공은 정치권으로 다시 넘어왔다. 야권은 중단 없는 탄핵을 외치고 있으나 새누리당 내 비박계 의원들의 동요와 균열을 무엇을 통해 수습할 수 있을지의 답을 고안해내야 하는 과제를 눈앞에 두고 있다. 해결책을 찾지 못하면 탄핵은 추진할 수 없게 되며, 상황은 박근혜 대통령의 2차 대국민담화 이전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박근혜 대통령이 바로 그 상황을 유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를 ‘함정’이라 불러도 과한 표현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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