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일 친박계 중진 의원들이 박근혜 대통령에게 ‘질서있는 퇴진’을 건의하기로 하면서 정국이 심상찮게 흘러가고 있다. 다소 간의 잡음은 있었으나 친박계는 대략 이러한 내용으로 입장 정리를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여전히 ‘퇴진’이 아니라 ‘탄핵 회피’에 방점이 찍혀 있는 것으로 보여 향후 정국은 오히려 혼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모양새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29일 새누리당 초선의원들은 회동을 갖고 “탄핵보다 ‘질서있는 퇴진’이 바람직하다”는 데 합의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스스로 사임 시점과 임기 단축 로드맵을 밝히고 이후 국면에 대처해야 한다는 취지다. 새누리당 소속 의원 128명 중 초선은 46명 가량인데 이날 회의에 참석한 초선의원은 25명 정도인 걸로 알려졌다. 이들은 이러한 의견을 이날 의원총회에 전달한다는 계획이다.

이들의 주장 중 또 하나 눈길이 가는 부분은 비상대책위원회 구성과 관련한 대목이다. 이들은 비박계가 일방적으로 비대위원장을 선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친박과 비박이 3인씩 포함돼있는 ‘6인 중진 협의체’에서 비대위원장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 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언론 보도를 종합해보면 비박계는 비대위원장 후보로 구 친이계로 분류되는 김형오 전 국회의장을 강력하게 밀고 있으나 친박계는 이에 대해 강력한 거부감을 보이고 있는 상황이다. 친박계는 김황식 전 국무총리나 조순형 전 의원 등을 언급하고 있는데, 본인은 의사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대구 출신인 유승민 의원을 고려해볼 수도 있다는 기류다.

이날 새누리당 초선 의원들이 언급한 6인 중진 협의체는 28일 이미 비박계가 추천하는 인사에 비대위원장을 맡기는 데 합의한 상태다. 구체적으로는 30일 예정된 회동에서 비박계가 비대위원장 3인을 추천하면 친박계가 이 중 1명을 선택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친박계가 중심이 돼있는 지도부는 이러한 합의 내용에 대해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고 있다. 새누리당 이정현 대표는 29일 최고위원회에서 “비주류에서 얼마든지 좋은 사람을 추천할 순 있지만 이런 식으로 주류 비주류를 기정사실화 하면 당의 화합이 어렵다”면서 “주류나 비주류에서 추천하니 무조건 받으라고 하면, (주류나 비주류에) 속하지 않은 나머지 초재선을 포함한 당 구성원들이 받을 수 있겠는가”라고 발언했다.

결국 새누리당 초선 의원들이 밝힌 비대위원장 선임 관련 이날 입장은 이정현 대표 중심의 지도부 입장에 힘을 실어준 것으로 볼 수 있다. 친박계가 합의할 수 없는 인사가 비대위원장 후보로 추천될 경우 지도부가 이를 ‘비토’할 수 있다는 근거를 만들기 위한 언급을 한 셈이다. 비박계가 선호하는 걸로 알려진 비대위원장 후보군들은 하나 같이 당에서 사실상 친박계를 내보내야 재집권이 가능하다는 주장을 내놓고 있다.

새누리당 초선 의원들이 당권 문제와 대통령의 퇴진 문제를 하나로 묶어서 입장을 낸 것은 결국 친박계 중진들이 대통령에 ‘질서있는 퇴진’을 요구한 것 역시 같은 맥락에 있다는 점을 가늠할 수 있게 한다. 6인 중진 협의체에 포함돼있는 새누리당 나경원 의원은 이날 YTN라디오 <신율의 출발 새아침>과의 전화연결에서 친박계 중진들이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한 것에 대해 “사실상 탄핵정국으로 가지 않고 질서 있는 퇴진 정국으로 가면서 비대위나 당의 권한도 놓지 않겠다는 것 아닌가 생각한다”라고 발언해 이런 전망을 뒷받침했다. 결국 ‘탄핵 회피’와 ‘당권 사수’가 연동돼있는 문제라는 거다.

정부서울청사에서 내려다 본 청와대 (연합뉴스)

친박계가 이어가고 있는 일련의 행보가 결국 ‘탄핵 회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이날 청와대의 반응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연합뉴스는 이날 기사에서 청와대 관계자의 발언을 인용해 박근혜 대통령이 30일이나 다음달 1일 퇴진 등에 대한 입장을 밝힐 수 있다는 점을 전하면서 “청와대 참모들 사이에선 국회의 탄핵 논의 절차가 중단돼야 박 대통령이 명예퇴진 방안을 포함한 해법을 수용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이 제기된다”고 보도했다. 연합뉴스는 구체적으로 “새누리당 친박, 비박계가 대통령에 대해 탄핵추진을 하지 않는 것으로 합치된 의견을 제시하고 국회에서 그런 논의를 끌어가는 것으로 결론이 나면 박 대통령은 그때 가서 임기 단축을 고려해볼 수 있을 것”이라는 청와대 참모의 발언도 인용했다.

이런 발언을 고려하면 결국 청와대와 친박계가 주시하는 핵심 포인트는 ‘비박계 탄핵 찬성표’의 단속에 가 있는 셈이다. 익히 알려져 있듯 비박계가 찬성하지 않으면 국회에서 탄핵소추안을 가결 처리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비박계 최대 계파를 이끌고 있는 김무성 새누리당 전 대표가 탄핵 찬성을 강하게 압박하면서 현재 탄핵에 찬성하는 비박계 의원은 40여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친박계가 ‘질서있는 퇴진’을 고리로 ‘보수재집권’ 시나리오에 시동을 거는 모습을 보이면 탄핵에 찬성하는 비박계 의원들의 개인별 입장이 흔들릴 가능성을 부정할 수 없는 게 사실이다. 김무성 전 대표가 그간 주장해온 탄핵 이후 국면에 대한 해법은 개헌을 고리로 한 ‘제3지대 정계개편’인데, 이러한 주장에 사실상 동력이 붙지 않고 있는 게 사실이다.

이대로면 야권의 대선주자 중 지지율 1위를 달리고 있는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가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높다. 새누리당 소속 의원들로서는 문재인 전 대표보다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과 같은 범보수권 인사가 정권을 잡는 게 여러모로 낫다. 이런 상황에서 버티던 친박계가 퇴로(?)를 열어주면 비박계 의원 중 온건한 입장을 가진 인물의 경우 못 이기는 척 ‘질서있는 퇴진’을 언급하며 탄핵 전선에서 이탈하는 선택을 할 수도 있다.

야권은 그간 비박계 소속 의원들에 대한 판단을 두고 신경전을 벌여왔다. 더불어민주당 측 인사들이 비박계 의원들을 ‘부역자’로 호칭하며 박근혜 정권 탄생의 정치적 책임을 묻겠다는 입장을 드러내왔다면 국민의당 측 인사들은 ‘악마와도 손을 잡아야 한다’며 비박계를 자극하지 말 것을 요구한 바 있다.

이런 상황을 종합해보면 결국 비박계를 가운데 두고 친박계와 야권이 서로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는 모양새가 돼버린 걸로 볼 수 있다. 이날 새누리당이 의원총회에서 그럴듯한(?) 결론을 내리거나 ‘금명간’ 발표될 걸로 보이는 박근혜 대통령의 입장 표명에 상당한 진전이 있다면 이 힘겨루기와 관련해서는 친박계 쪽에 다소 유리한 환경이 조성될 수 있다. ‘중단없는 탄핵 추진’을 위해 야권이 무엇이든 묘수를 내놓아야 하는 상황인 셈이다.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