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이 22일 국무회의를 통과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국정농단 사건으로 칩거를 하고 있는 상태에서 황교안 국무총리가 그간 국무회의를 주재해왔으나, APEC 정상회의 일정을 대신 소화하기로 하는 바람에 처지가 애매한 유일호 경제부총리가 대신 주재한 자리에서다. 유일호 경제부총리를 대신해 내정됐던 임종룡 금융위원장 역시 신분이 애매하진 상태에서 지난주부터 기획재정부 관련 보고를 중단시킨 걸로 알려졌다. 결국 사실상 누구도 제대로 책임질 수 없는 회의에서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이라는 중대사가 졸속 처리된 것이다.

더 심각한 것은 현 국무위원들이 심지어 말리는 사람을 제압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이날 국무회의에 배석해 국무위원들의 사퇴를 요구했다.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에 대해서는 “국회 다수가 반대하는 협정은 속전속결로 처리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따졌고 북핵 문제를 언급하는 윤병세 외교부 장관을 향해 “국민 합의와 신뢰가 있어야 정책에 힘이 담긴다. 국무회의에서라도 결의하지 말고 1주일이라도 의견 듣는 절차를 거치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박원순 시장의 이런 주장에 유일호 부총리는 “그만둡시다”라며 발언을 중단시키려 했고 이기권 고용노동부 장관은 “국정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사퇴를 논의하는 게 정당하냐”며 화를 내기도 했다고 한다. 연합뉴스 등 언론 보도에 등장하는 정부 관계자는 “박원순 시장이 선거 운동하듯이 국무회의를 정치판으로 만들어 대단히 유감”이라고 발언하고 있다.

22일 오전 서울 세종로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박원순 서울시장이 회의장에 들어서고 있다. (연합뉴스)

국무회의 결정에 야권은 격앙된 반응을 보이면서도 한민구 국방부 장관 거취 문제로의 ‘확전’은 경계하는 모양새다. 대통령에 대한 탄핵을 논의하는 국면에서 국방부 장관까지 탄핵 또는 해임건의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국민적 불안을 증대시킬 수 있다는 논리다. 그러나 박근혜 정권의 이런 협정 체결 추진은 동북아 전체 질서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점을 더 무겁게 봐야 한다.

최근 불거지고 있는 중국의 한국에 대한 ‘불매’ 분위기를 보면 그렇다. 최근 각 언론은 중국이 한반도 사드 배치 문제 등에 대한 대응으로 지난 10월부터 한국 연예인들의 중국 내 활동을 규제하고 있다는 보도를 이어가고 있다. 실제 중국 문화부 홈페이지를 보면 지난 10월 이후 공연을 승인받은 한국 연예인들이 한 사람도 없는 것으로 나타난다. 중국의 이런 대응은 사드 배치를 추진하던 당시 예상됐던 비관세 장벽을 통한 경제보복조치의 일환으로 해석할 수 있다.

물론 중국의 경제적 배려를 얻어내기 위해 국가의 안보를 협상 소재로 하자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이 상황을 ‘관리’하기 위한 대책이 있어야 할 필요는 분명히 있다. 중국 정부의 이와 같은 행위는 중국 내에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민족주의를 배경으로 한 것이며, 이를 다시 강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 취임 이후 중국 정부는 ‘대국굴기’ 등의 슬로건을 내세우며 자국 중심의 민족주의를 강화시켜 나가는 추세다.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은 사드 한반도 배치와 함께 중국 내의 민족주의를 확대시킬 하나의 촉매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이 동북아시아의 외교질서가 미국 대 중국이라는 양대 패권세력의 힘겨루기 양상을 가속화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외교안보전문가를 자처하는 정의당 김종대 의원은 21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한미군사정보보호협정에 대해 “미국을 장인으로, 일본을 장모로 모신 대한민국이 데릴사위가 되는 일종의 약혼식”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런 해석을 보면 동북아시아 질서 내에서 한미일 동맹 구도가 지금보다 강화될 경우 중국 민족주의의 전통적인 반일 반미 정서에 ‘반한(反韓)’ 정서가 포함될 가능성이 커진다고 볼 수 있다.

미 대선에서 승리한 도널드 트럼프가 내년 1월에 취임한다는 점도 문제다. 도널드 트럼프 당선자는 동아시아에서의 중국 패권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취해왔다. 다만 중국과의 문제는 무역 및 통상이라는 측면에서 불거질 가능성이 크고 동북아시아 정세와 관련해서는 일본에 상당한 역할을 부여하는 것으로 트럼프식 고립주의를 추구할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의 이러한 독특한 외교 노선이 중국 시진핑 정권에게 오히려 안도감을 주고 있다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무역 및 통상과 관련한 문제에서야 갈등이 불가피하지만 적어도 남중국해 문제 등 미국과 중국이 직접적인 군사적 충돌을 빚는 대목에서는 오히려 갈등을 우회해 패권을 확대할 수 있는 기회를 찾을 수 있게 된다는 거다. 중국으로서는 이 기회를 활용하기 위해 미국의 대리인인 일본에 대한 반일민족주의를 고취시키려는 노력을 할 가능성이 크다. 한일군사정보보호호협정은 이 과정에서 일본과 한국을 동시에 적대하는 ‘고리’로 작용하게 될 것이다.

이런 국면에서는 당연히 외교안보적 측면에서의 지혜로운 처세로 국익을 극대화하는 전략 전술이 요구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박근혜 정권은 북한의 4차 핵실험 이후 외교안보적 측면에서 어떤 제대로 된 대안적 정책을 내놓은 바가 없다. 오히려 국정농단 의혹이 제기된 이후에는 외교안보정책에도 비전문가인 최순실 씨의 입김이 닿은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오는 실정이다. 언론들은 박근혜 대통령의 대북정책이 ‘북한붕괴론’에 근거했었던 게 최순실 씨가 별 근거도 없이 북한이 2년 내에 망한다는 주장을 펴고 다녔기 때문이라는 보도까지 내놓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국정운영에 적극적으로 임하지 않는 상태에서도 사드 한반도 배치와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 체결만큼은 반드시 추진해야 한다는 입장을 주변에 수차례 밝혔다고 한다. 그러나 모든 경우의 수를 고려해 섬세하게 접근해 추진해야 할 일을, 잘못된 정책에 책임질 능력도 의지도 없는 사람들이 모여 결정한 것은 제대로 된 일이 아니다.

제24차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참석차 페루를 방문중인 황교안 국무총리(왼쪽)가 19일(현지시각) 페루 리마 컨벤션에서 열린 기업인자문위원회에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오른쪽) 등과 함께 참석해 있다. (연합뉴스)

당장 12월에 일본 도쿄에서 열릴 것으로 예상되는 한중일 정상회의가 문제다. 박근혜 대통령은 이 자리에 참석하겠다는 입장을 강력하게 내비치고 있다는데, 원칙을 따지지면 이 자리에 가도 문제 안 가도 문제이다. 헌정을 유린한 대통령이 다른 국가의 정상들과 어깨를 나란히 해 국가의 중대사를 논하는 것도 옳지 않고, 대통령의 직무를 대리하는 국무총리가 이 자리에 참석해 민감한 외교안보정책을 좌우하는 것도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결국 대한민국의 안보를 위해서라도 박근혜 대통령이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자리를 다른 이에게 넘겨줘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다. 대통령 본인은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날 의지가 없으니 정치권이 초당적 협의를 통해 빠른 시일 안에 탄핵을 관철시켜야 한다. 장담할 수 없는 헌법재판소의 기각 결정 우려는 국민적 여론 수렴과 이의 표출로서 불식시켜야 한다. 이것이 여전히 탄핵 추진과 장외투쟁의 중요성을 강조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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