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작가 프리모 레비(1919∼1987)는 1943년 반파시즘 무장투쟁에 나섰다. 말이 좋아 ‘무장투쟁’이지, 레비가 속한 조직은 전투는커녕 사격 연습 한번 변변히 못해본 채 스파이에게 속아 체포됐다. 그러나 그는 다른 조직원들과 달리 처형되지 않았다. 대신 아우슈비츠에 수용됐다. 그는 유대인이었다. 행운이 아니었다. 정치범이라는 알량한 시민권마저 박탈되고, 인종청소의 대상으로서 비인간이 된 셈이었다. 결과적으로 그는 ‘운좋은’ 극소수 수용자에 들었다. 그는 살아서 아우슈비츠 밖으로 걸어나왔다. 훗날 그는 처형되는 게 나았다고 회고했다. 평생 홀로코스트의 역사를 치열하게 기록하던 그도 끝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일주일 남짓 비정규직보호법 논란을 지켜보면서 레비와 아우슈비츠를 떠올렸다. 정부와 한나라당, 자본, 그리고 무엇보다 보수언론은 비정규직 노동자들(레비)이 해고(처형)되지 않으려면 법 시행 유예(아우슈비츠 수용)라는 ‘은전’을 베풀어야 한다고 눈물 연기까지 해가며 목소리를 높였다. 본보기는 공기업 비정규직 노동자들이었다. 나치가 유대인을 잡아들이기 가장 쉬운 공간이 게토(유대인을 강제 격리하기 위해 설정한 유대인 거주지역)였듯이. 그들을 무더기 해고한 것은 사실상 정부였다. 비정규직의 눈물을 닦아줘야 한다는 눈물어린 주장은 정작 공포의 프로파간다였다.

프로파간다는 완전한 허구에 터하지는 않는다. 다만 사금파리 같은 일부 사실을 부풀리고 맥락을 잘라 자의적으로 재구성할 뿐이다. 유럽사회가 보기에 유대인들은 내부 결속이 강한 만큼 외부에 대해서는 비사교적이었다. 수 천 년 디아스포라(팔레스타인을 떠나 전 세계에 흩어져 살면서 정체성을 유지해온 유대인들)가 낳은 산물이었다. 히틀러와 나치는 이런 유대인들을 위대한 아리아인을 위협하는 존재로 표상했다. ‘100만 해고설’도 마찬가지다. 비정규직보호법이 비정규직 노동자를 제대로 보호할 수 있는 법이 아닌 것은 사실이지만, 무자비한 해고를 부추기는 법도 역시 아니다. 100만 해고설은 이 부분적 사실을 ‘비정규직 노동자 학살’로 둔갑시켰다.

비정규직보호법이 보호하고자 하는 대상이 비정규직 노동자인지 아니면 사용자인지는 입법 논의 단계에서부터 심각한 논쟁거리였다. 이 법이 비정규직을 보호하려면 비정규직 노동자의 작업 숙련도에서 얻을 수 있는 사용자의 이익이 정규직 전환에 따른 비용 증가를 상쇄하고도 남는다는 전제가 성립해야 한다. 그밖에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유도할 어떠한 장치도 이 법에는 없다. 설령 이 법의 이런 취약한 전제가 성립하더라도 작업 숙련도와 노동유연성은 사용자에게 반드시 양자택일이 요구되는 대칭관계에 있지 않은 게 현실이다. 노동기간보다는 노동자를 죄는 강도가 숙련도에 더 결정적 변수라는 게 그들의 일반적 셈법이니까.

하지만 비정규직 노동자가 양산되는 걸 막고 그들의 정규직화를 유도한다는 이 법의 명분마저 부정할 수는 없다. 명분과 실질의 괴리를 줄이는 방법은 실질이 명분에 다가가도록 조정하는 것이다. 거꾸로 법이 실질을 좇아가면 정의에서 멀어진다. (영어 justice에는 ‘정의’뿐 아니라 ‘사법’ ‘재판’ ‘판사’ ‘법무’ 등 법과 관련한 뜻도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를 보호하려면 사용자들이 함부로 비정규직을 고용하거나 자를 수 없게 하고, 정규직으로 전환하면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하면 된다. 그 빤한 이치를 두고 ‘법 시행 유예’의 주술을 외우는 건 “인간 대접 해달라고 요구하지 않으면 가스실에 보내지는 않으마”라고 으르는 것이다.

공포의 프로파간다는 며칠새 거짓으로 드러났다. 이 법 때문에 잘리는 노동자들은 분명히 있었다. 그러나 법이 시행되고 일주일 동안 정규직 전환 대신 해고된 노동자는 1222명에 그쳤다. 하루에 몇천명씩 잘릴 거라는 주장은 공갈이었다. 실업급여를 신청한 전체 계약직 노동자 가운데 이 법 때문에 일자리를 잃은 경우는 27.8%였다. 정부 스스로 밝힌 숫자가 그렇다. 그나마 상당수가 공기업 노동자였다. 그러나 이들은 포기를 모른다. 정작 속뜻은 딴 데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교묘하게 언술을 변주하며 그 깊은 속내를 언뜻언뜻 내비치고 있다.

서민을 위해 300억 재산까지 헌납한다는 대통령은 “결국은 노동유연성이 문제”라며, 정규직 없는 세상을 꼭 만들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피력한다. 보수신문은 “기업들이 비정규직을 해고하는 건 돈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강성 노조에 가입할 것이 걱정되기 때문”이라며 노조 없는 세상을 위한 성전을 부추긴다. 비정규직보호법 유예 주장은 비정규직에 관한 담론이 아니라 조직화된 정규직에 관한 담론이었다. 유대인을 절멸하고 집시와 장애인을 멸종시키려는 음모는 공포와 적개심으로 제국주의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내부 단결용이었다.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이 다시 열리길 기대하기 어려운 현실이 갑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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