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1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2015년 9월 KBS 이사 3년의 임기를 마치는 회의에서 “부디 슬기롭게 연착륙하기를 바란다”는 당부의 말을 그때 사장을 비롯한 집행 간부들에게 한 기억이 난다. 여권이 추천하는 이사후보들이 청와대에 면접을 보러 갔다는 소문도 사실로 드러나던 때였다. 최소한의 정상화를 이룬 지 얼마 지나지 않은 터에 휘몰아칠 반동에 대한 불안함이 그만큼 컸던 탓이다. 불행하게도, 고대영 사장 등장 이후 우려는 참담한 현실이 됐다. 수신료 인상을 포기하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그는 현 정권과 운명을 같이 할 사람이라는 판단도 하게 됐다. 불행하게도, 현실은 이것도 그리 틀리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짧게는 이사로서 보낸 임기 3년, 길게는 지금의 종합편성채널(조중동 방송)을 탄생시킨 2009년 7월 언론법 날치기 이후 6년을 돌아보면서 ‘공영방송 굳이 지상일 필요가 있나 - 언론 장악의 성적표와 공영방송 필요성에 대한 어떤 의문’(미디어스 2016년 7월5일)이란 글을 쓴 적이 있다. 여기에 담은 ‘공영방송의 총체적 재건을 위해선 거버넌스 손질만이 아니라 해체에 버금가는 구조 개편이 필요하다’는 생각은 지금의 정국에서도 변함이 없다. 다만, 최소한의 저널리즘 회복을 위해 여소야대 국회 상황에서 지금 당장이라도 해야 할 것은 해야 한다는 데도 동의한다.

‘최순실 방지법’이 아니라 ‘세월호 기억법’이라 부르는 게 맞다

야권에서 지난 7월 KBS 등의 저널리즘 정상화를 위해 거버넌스를 손질하는 방송법 개정안 등을 제출한 게 여기에 해당한다. 이들 법안에 대해 언론들은 ‘최순실 방지법’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해할 수는 있어도, 동의하기는 어렵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실체가 드러나지 않던 때에 제출된 법안에 이렇게 작명하는 것은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게 첫 번째 이유요, 이들 법안에는 KBS만이 아니라, MBC를 비롯한 나머지 지상파방송, 보도전문채널, 종합편성채널을 아우르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는 게 두 번째 이유다. 이들 법의 적용 대상에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파헤치기 위해 애쓴 JTBC 등도 포함된다는 점만 지적하자. 아울러, 이들 법안의 제출의 배경에 ‘세월호 언론보도 참사’가 자리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세월호 기억법’이라고 해야 더 맞는 듯하다.

이들 방송의 공통점은 정부로부터 허가나 승인을 받는 보도여론 관련 방송사들이라는 점이다. 공정하고 정확한 보도여론 기능은 민주주의의 인프라에 해당한다. 그래서 이 인프라 기능을 하는, 공영방송은 물론이고 정부로부터 허가나 승인을 받는 보도여론 관련 방송사들은 방송사업자(사장이나 편집 책임자)와 보도여론 종사가 동등하게 구성하는 편성위원회를 구성해 운영하고 제작의 자율성을 높이기 위한 편성규약을 제정해 적용해야 한다는 게 이들 법안의 공통분모이다.

공통분모를 제외하면, 공영방송의 상징인 KBS에 적용되는 내용들이다. 모두 해묵은 숙제들이었다. 필자가 이사로 있는 동안 이사회가 규정을 제정해 자율적으로 실시하자고 했다가 거부됐던 사안도 포함돼 있다. 핵심은, ‘KBS 이사회 구성에서 여야의 이사 추천 비율을 기존의 7명 대 4명에서 7명 대 6명으로 바꾸고, 이사회에서 사장을 대통령에게 임명이나 해임 제청 할 경우 기존의 과반 찬성에서 3분의 2 찬성으로 바꾸자’는 것이다. 이른바 특별다수제다. 사장이 인사 등을 통해 보도여론에 미치는 직간접적인 영향력이 매우 크다는 사정을 감안해 서로가 동의할 수 있는 인물에 합의해 보자는 취지를 갖고 있다. 마찬가지로, MBC 대주주인 방송문화진흥회에도 이런 내용을 적용하자고 제안돼 있다.

개인적으론, 이들 법안의 모든 내용에 동의하는 건 아니다. 예를 들어, KBS 이사회가 15명 이내의 사장추천위원회를 의무적으로 구성하도록 한 것은 권한 위임을 둘러싼 상당한 법적 논란은 물론 심각한 세부 운영상의 문제점이 불거질 수 있는 부분이다.

지난달 13일 오후 국회에서 미래창조과학방송통신위원회의 종합감사가 열리고 있다. 왼쪽부터 곽성문 코바코 사장, 고삼석 방송통신위원회 상임위원, 김석진 방통위 상임위원, 김재홍 방통위 부위원장, 최성준 방통위원장, 박효종 방송통신심의위원장, 전진국 KBS 부사장, 고영주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 우종범 EBS 사장.

새누리당의 표변, 게이트 정국 돌파 카드 속셈인가

이런 내용을 담은 ‘세월호 기억법’은 지난 15일 국회 미래창조과학방송통신위원회(미방위) 전체회의에서 법안심사소위에 회부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이뤄지지 않았다. 전날까지만 해도 그러자고 하던 새누리당이 전체회의에 계류시키겠다고 태도를 확 바꾼 것이다. 국회법상 해당 상임위 전체회의에서 발의가 되면 법안심사소위로 넘기게 돼 있는데, 이마저 무시한 것이다. 미방위 소관 109개 법안 중 100개는 넘겨도 ‘세월호 기억법’을 포함한 방송 관련 9개 법안은 못 넘긴다고까지 한 모양이다.

돌변한 것이니만큼 분명히 이유가 있을 것이다. 추정에 앞서 두 가지를 기억해 두자. 첫째, 게이트의 몸통인 대통령은 성실히 받겠다던 검찰 수사도 제대로 받지 않고 버티면서 대통령 행세를 하고 되치기를 하려 한다는 점이다. 어제는 어떤 사건에 대해 ‘철저히 수사해서 관련자를 엄벌하라!’라고 지시하는 엽기 행각까지 펼쳤다. 둘째, 이에 발맞춰 새누리당, 특히 친박 세력은 전열을 재정비하며 본격적인 ‘농성전’을 벌일 채비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맥락에 돌변한 태도를 넣어 보자. 먼저, KBS, MBC 두 방송에 적용해 보자. 경기순환을 피할 수 없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업의 구조조정은 일종의 숙명이다. 이에 맞춰 핵심 자산은 보호하고 그렇지 않은 자산은 가차 없이 처분하는 게 대다수 기업가의 생리다. 새누리당이 쉽게 처분할 수 없는 핵심 자산이 바로 KBS 이사회의 여권 이사들, MBC 방문진의 여권 이사들이다. 이들이 임명한 두 방송사의 사장은 지금까지 정권에 아낌없는 충성을 발휘했다. 방송법 개정안과 방송문화진흥회법 개정안에 담긴 ‘세월호 기억법’의 내용은 이것이 무너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들 법의 부칙은 ‘공포하고 3개월 경과 뒤 시행’, ‘법 시행 뒤 3개월 이내 새로운 이사회 구성’이다. 20대 정기국회가 끝나는 12월 초순 공포된다면, 내년 6월에는 두 방송사의 이사회가 새로 구성되게 된다. 게다가, KBS의 경우 고대영 사장 쪽과 보도여론 종사자가 동수로 구성하는 편성위원회가 내년 3월부터 본격적인 가동에 들어간다. 보수층을 재결집해서 되치기라도 하려면 이들 두 방송에 정상화는 절대 허락되지 않는다.

다음으로, 나머지 지상파방송, 보도전문채널, 종합편성채널에 적용해 보자. 대부분의 방송사업자는 보도여론 종사자와 동수로 구성하는 편성위원회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다. 하물며, ‘조중동 방송’으로 불리는 종합편성채널의 경우 더욱 그러하다. JTBC가 손석희 사장을 중심으로 고군분투하지만, 여기에 흔쾌히 찬성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드는 것은 그 뒤의 홍석현 중앙일보 사주가 어른거려서다. 하물며,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그림자가 각각 드리운 TV조선이나 채널A의 방송사업자가 어떠할지 미뤄 짐작이 간다. 수준 이하의 반노동 적대주의를 담은 보도를 꾸준히 심심찮게 내보내는 매일경제신문이 뒷배경을 이루는 매일방송의 방송사업자도 그리 사정은 다르지 않다. 아마도, 이들 사업자 쪽에서 ‘이건 안 된다’는 메시지를 새누리당 쪽에 보냈으리라 짐작해도 그리 틀리지 않을지 싶다.

이들 방송의 게이트 정국에 대한 해법은 약간씩 다르기도 하고 모호하기도 하지만, 대통령이 국정에서 사실상 손을 떼야 한다는 데 지금까지는 일치하고 있다. 대통령이 민심을 깡그리 무시하고 있는 것에 분노하고 있다는 것에도 일치하고 있다. 이런 방송들을 상대로 새누리당이 동원할 수 있는 ‘팻감’이 있다면 무척 반가울 것이다. ‘세월호 기억법’은 그렇게 하기에 충분히 매력적으로 보였을 것이다. 게다가, 이들 방송의 주요한 시청자층은 재계와 노년층이 상당수를 차지하는 보수층이기까지 하다.

여전히 세월호의 진실은 차가운 바다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다. 불행하게도, 새누리당은 그 참사를 잊지 말자고, 그 언론 보도 참사를 잊지 말자고 제출된 ‘세월호 기억법’까지 게이트 정국의 물타기 수단으로 이용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는 데까지 이른 듯하다. 부칙의 일부 내용을 양보하는 한이 있더라도 ‘세월호 기억법’만은 반드시 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리고 야권은 스스로에게 물음을 던져야 할 것 같다. 저들이 집요한 농성에 들어가기 시작할 때까지 도대체 어떤 공성 무기를 사용한 적이 있는지를 말이다. ‘탄핵 할테면 해봐!’라고 나오는 대통령의 ‘버티기' 초식을 부른 책임에서 야권은 자유로운지 말이다. 나의 한 팔을 내주고 적의 목을 치는 배짱과 용기, 아니 독기가 없다면 야권은 지는 정치를 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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